그리스도의 매장 – 베네치아 색채주의의 선구가 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D%C3%A9partement_des_Peintures_du_Louvre-LA_MISE_EN_TOMBEAU_-_circa_1525.jpg?type=w773 La Mise en Tombeau - Tiziano


티치아노의 1520년경 작품이다. 148 cm x 212 cm 크기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는 1488~1490년경 이탈리아 북동부의 피에베라는 작은 산악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9살이 되던 해에 환경이 전혀 다른 베네치아로 이주해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종교, 신화, 초상, 풍경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특히 색채의 깊이와 감정 표현에서 탁월함을 보였으며, 1513년에는 자신의 작업장을 열어 유럽 전역에서 의뢰를 받는 잘 나가는 화가로 성장했다.


교황 바오로 3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데스테, 곤자가, 합스부르크 가문 등 유럽의 권력자들이 그의 작품을 수집했으며, 153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가 명성을 얻기까지에는 당대 영향력 있는 문필가이며 그의 대리인 역할을 한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공이 적지 않았다.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 1492–1556)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풍자 문학가, 극작가, 언론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대 예술과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외설 문학의 선구자로도 평가받았으며,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또한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권력자들을 움직이기도 했다.


그는 1492년 이탈리아 아레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당시 지식인의 필수 언어였던 라틴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전적인 권위에 도전하며, 라틴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전주의자들을 비웃고 독창성을 강조했다.


그는 외설적인 작품을 통해 성적 리얼리즘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며 사회를 비판했으며 다양한 희곡을 집필하며 연극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티치아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화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작품 문학적 해석을 제공했다.


그는 권력자들에게 아부와 풍자를 섞은 편지를 보내고, 그 내용을 출판함으로써 돈과 선물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 일종의 파워 블로거 역할을 한 것이었다. 당시 발명된 활자와 인쇄술은 그의 언어를 대중에게 전파하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피에트로를 근대 저널리즘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피에트로는 교황 바오로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티치아노의 그림을 극찬하며 그들에게 추천했다. 아레티노는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고 시와 산문을 써서 함께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협업 방식이었으며, 이는 티치아노의 작품에 문학적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형제처럼 여겼으며, 아레티노는 티치아노의 그림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해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이었다


티치아노는 색채주의의 선구자다. 붓질과 색의 층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화풍은 루벤스, 반 다이크, 들라크루아 등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도 티치아노의 흔적이 보인다고 평가되고 있다.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Entombment of Christ)>은 그의 초기 작품 중에서도 가장 감정적으로 강렬하고, 색채적으로 깊이 있는 종교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뒤,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죽음과 슬픔, 인간의 연민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중앙에는 예수의 시신이 무겁게 늘어져 있고, 두 인물이 그를 들어 올려 석관으로 옮기려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거의 가려져 있지만, 그의 창백한 피부와 늘어진 자세가 죽음의 무게를 상징한다.


주변 인물들의 표정은 깊은 슬픔과 경건함으로 가득하며, 특히 검은 상복을 두른 마리아의 절망적인 눈빛이 인상적이다. 배경은 어둡고 구름이 드리워져 있으며, 인물들의 근육과 옷자락은 꿈틀거리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예수의 창백한 몸과 주변 인물들의 어두운 옷이 죽음과 생명의 대비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수의 발에 남은 못 자국은 신성한 고통의 상징으로 화면 하단에 강조되어 있다.


특히 그림에 등장하는 두 여인—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서 각각 ‘신성한 모성’과 ‘회개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끝까지 지켜본 인물로, 요한복음 19장 25절에는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는 어머니로서, 인간적인 슬픔과 신성에 대한 순종을 동시에 상징한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해석하며, 그녀의 고통은 인류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는 희생으로 여겨지고 있다. 깍지 낀 손과 침묵 속의 비탄은 성모의 내면적 고통을 강조하며, 그녀의 존재는 작품 전체에 경건함을 부여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인물로 등장하며, 예수께서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고 말씀하신 장면은 그녀의 깊은 사랑과 인간적인 애착을 보여주기도 한다. 루카 복음 7장에서는 죄 많은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교회 전승에서는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고 있다. 그녀는 죄를 뉘우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한 인물로, 인간의 구원 가능성과 은총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만토바 공국을 이끈 곤자가 가문이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구입하고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ntierro de Cristo - Tiziano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도 같은 이름의 티치아노 작품이 있다. 1559년 또는 1572년경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티치아노는 직접 스페인에서 활동한 적은 없지만, 스페인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작품을 다수 제작했고,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스페인 궁정 미술에 깊이 스며들었다.


티치아노는 피에트로의 적극적인 후원과 홍보 덕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귀족 작위와 황금 박차 기사 작위를 받으며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는데,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왕이기도 했기 때문에, 티치아노는 자연스럽게 스페인 왕실을 위한 초상화와 종교화를 다수 제작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예술을 통해 권위를 과시하려 했고, 티치아노는 그에 걸맞은 최고의 화가였다. 특히 티치아노가 활동한 베네치아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스페인은 그의 베네치아 예술을 수입해 자국의 궁정 문화 수준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티치아노는 대부분의 작품을 베네치아에서 작업한 후 잘 포장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벨라스케스와 고야 같은 후대 스페인 화가들은 티치아노를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그의 작품을 연구하고 시험했다.


프라도 미술관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루브르 박물관의 것보다는 30∼40년 후기의 작품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은 베네치아파 특유의 부드러운 색채와 균형 잡힌 구도로 절제된 슬픔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자연스러운 명암 처리로 인물 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인 것이다.


반면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은 티치아노 말년에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더욱 격렬하고 붓 터치가 거칠며, 감정이 폭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고통과 절망이 극대화되고 있으며 극적인 명암 대비로 장면의 긴장감을 높다. 전체적으로 죽음의 무게와 인간의 고통, 신의 구속이 뒤섞인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티치아노의 루브르와 프라도 소장 「그리스도의 매장」은 그의 예술적 여정 속에서 종교적 주제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고 있다. 루브르의 작품은 감정의 흐름과 빛의 상징성을 통해 그리스도와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조명하며, 경건하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면, 프라도의 후기작은 색채의 격렬함과 질감의 깊이를 통해 죽음의 신비와 인간 존재의 고통, 그리고 종교적 경건함을 더욱 응축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티치아노가 말년에 이르러 죽음과 구속,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더욱 깊이 성찰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Pieta - Titian

티치아노는 당시로선 놀라운 장수(약 86세 이상)를 누렸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외로움과 상실감을 깊이 경험했다. 사랑하는 아들 오라치오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그린 작품이 <피에타>다. 이는 티치아노가 자신의 무덤에 놓을 작품으로 직접 제작한 것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다. 죽은 예수는 아들 오라치오를 상징하며 이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은 티치아노 자신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작품을 채 완성하지 못한 채 당시 베네치아를 강타한 페스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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