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베로네세가 1573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555 x 1280cm의 대작으로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명으로,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와 함께 ‘베네치아 3대 거장’으로 불린다. 그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 극적인 구도, 연극적인 연출로 유명하며, 특히 대규모 연회 장면과 종교화를 통해 독창적인 시각의 향연을 구가했다.
〈레위가의 향연>(Feast in the House of Levi)은 베로네세 특유의 장식적인 건축 배경과 풍부한 색감이 돋보인다. 타일의 무늬 바닥, 웅장한 아치, 계단 등은 관람자의 시선을 중앙의 예수에게로 이끄는 원근 구도를 만든다. 예수와 제자들 외에도 어릿광대, 난쟁이, 독일 용병, 앵무새, 술 취한 하인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며 연회의 분위기를 연극처럼 연출하고 있다. 베로네세는 성경 속의 장면을 당시 베네치아 사교 문화와 결합시켜, 종교적 엄숙함보다 현실의 인간들의 축제의 즐거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주문받았지만, 너무 많은 비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관은 베로네세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앵무새를 들고 있는 어릿광대, 코피 흘리는 하인, 술 취한 사람들을 그렸는가?”
베로네세는 당당히 답했다.
“이 그림은 컸고, 그래서 많은 인물을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적절한 생각과 방식으로 그림을 여백을 채웠을 뿐이다.”
결국 그는 그림을 수정하지 않고, 제목만 <레위가의 향연>으로 변경하고 이단으로 몰리는 위기를 모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예술의 자유와 종교의 권위 사이에 긴장 관계를 만든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베로네세는 당시 반종교개혁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도 예술가의 창작 자유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를 세속적 연회로 재해석하고, 신성과 인간성의 경계를 탐구하고 있다. 그림 속 연회는 실제 베네치아 귀족 사회의 사교적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종교적 서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풍속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베로네세의 <레위가의 향연>에서 레위(Levi)의 정체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레위는 구약 성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인 레위 지파(Tribe of Levi)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은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으로, 종교적 제사를 담당하는 가문이었다.
레위 지파는 출애굽 이후 성막 중심의 신앙 공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예루살렘 성전 시대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왔다.
레위 지파 중 아론(모세의 형)의 후손은 제사장 직책을 맡고 다른 후손들은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성전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성물을 관리하고, 성전의 경비 등 다양한 역할이 그들의 몫이었다.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레위 지파는 자신들의 땅을 분배 받지 않고, 대신 다른 지파로부터 십일조와 공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구약성서 민수기에서는 하느님이 “레위인을 이스라엘의 맏아들 대신 나의 것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할 만큼 하느님께 특별한 신임을 받은 지파로 여겨졌다.
예수 시대에도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활동했으며, 레위기(Leviticus)라는 성서도 이 지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러나 베로네세의 <레위가의 향연>은 정작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세리 레위(마태)가 예수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장면을 다룬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
세리는 예수 시대 로마제국의 공무원으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던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 직업은 충직한 공무원이 아니라, 매국노나 탐욕스러운 자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마에 거둔 세금의 일정액만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착복하는 비리를 일삼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부정한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권유했으며,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이후 레위는 자신의 과거를 숨지지 않고 세리 마태라고 소개하며 신앙에 전념했으며 후대인들은 그를 마태복음의 저자나 최소한 복음서의 출처자로 여기게 되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예수의 부름을 받은 례위가 즉각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많은 세리와 다른 사람들의 함께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비난하자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답했다.
베로네세의 <레위가의 향연>이 종교재판에까지 제소된 것은 당시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교황청의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지침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종교개혁 열풍에 맞서 예술에 있어서도 이전 보다 더욱 강렬하게 종교적 권위와 신앙의 정체성을 표현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종교개혁파는 가톨릭교회가 면죄부 판매, 성직자의 세속화, 교황권 남용 등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교황의 권위와 성사(의식) 중심의 신앙을 비판했다.
특히, 루터는 신앙의 본질이 교황이나 사제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 대중도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장 칼뱅도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예정설과 엄격한 윤리 규범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은 교황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이 예정한 것이기 때문에 교황에게 구원을 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성례전 중심의 신앙을 비판하며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성찬이 예수의 몸과 피가 아니라 단지 기념물이고 교회 내의 성상이나 성화는 우상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고, 교회는 교황청이 아닌 세속의 정부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전역에 개신교(루터교, 칼뱅주의, 성공회 등)가 확산되기 시작하고 교황권이 약화하는 대신 왕권이 강화되며 종교의 권위와 분리한 근대 국가 형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개신교의 확산에 위협을 느낀 가톨릭교회는 내부 개혁과 교리 재확립을 통해 이에 대응했다.
1545년부터 10년간 계속된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재정립하고,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했으며, 면죄부 남발을 금지하는 등 개혁안 채택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예수회(Jesuits)를 설립하고 교육과 선교를 통해 가톨릭 신앙 확산에 기여했다. 예수회는 주로 교육, 선교, 개신교 확산 저지, 사회 정의 실현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가톨릭 수도회였다. 예수회는 특히 유럽 전역에 신학교를 설립하며 고전학과 신학 교육을 강화했으며 오늘날에도 조지 타운대, 보스턴 칼리지, 서강대학교 등 226개 이상의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예수회는 또한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개신교의 확산을 저지하는 한편 가톨릭의 포교 활동을 전개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인도·일본 선교), 마테오 리치(중국 선교) 등이 있다.
교황청은 종교재판을 강화하여 이단을 색출하며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애썼으며, 특히 성당의 장식을 화려하게 하는 바로크 미술을 통해 교회의 아름다움과 장엄한 권위를 강조했다.
미술사는 베로네세가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화풍을 완숙시킨 거장임과 동시에 가톨릭 신앙에 기반을 둔 바로크 미술의 격정과 극적 연출을 이행하는 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서,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권위를 시각적으로 설득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반종교개혁의 시각적 전략과 맞물려, 신앙의 감동과 교회의 위엄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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