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카라바조가 1601년∼1605년경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369 x 245 cm의 대작이며 루브르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카라바조(Caravaggio), 본명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16세기말~17세기 초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을 이끌어낸 천재 화가이자 논쟁의 인물이다. 그의 삶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극적이고 격정적이었다.
바로크 미술은 16세기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사조로, 르네상스의 균형과 조화에서 벗어나 극적인 감정 표현, 역동성, 화려함을 강조한 양식이다. 이 사조는 단순히 미술뿐 아니라 건축, 조각, 음악, 문학, 연극 등 전방위적으로 퍼졌고, 특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 불리는 명암의 대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후에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한 기법이다.
또한 정적이고 균형된 분위기의 르네상스 사조와는 달리 인물들이 움직이는 듯한 포즈와 비틀린 자세로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이러한 동적인 모습은 해당 인물의 슬픔, 경외, 환희 등 내면의 느낌과 열정을 극대화하여 보는 이의 공감을 자아내 그림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바로크 시대 건축과 조각은 규모와 자태를 웅장하게 표현하여 시각적으로 거대한 권력의 위엄과 신앙의 장엄함을 대변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는 천장화 등 원근감 있는 환상적인 장식을 사용하여 공간감을 확대하여 보이도록 하는 착시적 기법을 활용했다.
이 같은 바로크 예술 양식은 개신교의 확산과 성화 등 교회 장식에 대한 거부 운동에 대한 반동에서 확산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가톨릭 신앙의 감동과 권위를 보다 시각적으로 부각하는 종교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루이 14세와 같은 절대 군주들은 바로크 왕권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상징하는 도구로서 바로크 예술을 궁전 예술의 하나로 차용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서민들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부각하고 권익을 확대하는 수단으로써, 평범한 일상의 풍속을 강조한 바로크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 그림의 중심에 위치했던 성인이나 종교적 신성을 지우고 이 자리에 자신의 모습과 일상의 장면을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써 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이를 향유한 것이다.
카라바조는 귀족이나 이상화된 인물 대신, 거리의 부랑자, 창녀, 노동자를 모델로 삼아 성서 속 인물을 대변했다. 그는 종교화를 그렸으나 그 속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 방식도 전통적인 밑그림 없이 직접 캔버스에 유화로 그리는 ‘알라 프리마’ 기법을 사용하여, 인간적인 즉흥성과 직관을 중시했다.
카라바조는 그의 불우한 성장 배경과 천재성으로 근본적으로 사회적 규범에 구속받는 삶을 살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는 폭행, 살인, 수감, 탈옥 등으로 수사 기록에 15번 이상 등장한 인물이었다. 1606년 결투 중 살인을 저지르고 로마에서 도망하여 이후에는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등지에서 유랑 생활을 하다 1610년 38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사인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말라리아 감염, 살해, 정치적 음모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하고 있다.
어찌 됐든 미술사는 카라바조를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극 사실주의와 숨 쉬는 듯한 감정 표현과 긴장감은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20세기 이후 다시 그 진가가 재조명되는 등 현대 미술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고 아니할 수 없다.
카라바조의〈성모의 죽음(The Death of the Virgin, 1606)은 바로크 미술의 정점이자, 종교화의 경계를 뒤흔든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신성함과 인간성 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예술과 가톨릭 교리가 맞서는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성모는 창백한 얼굴, 힘없이 늘어진 팔과 다리, 부은 듯한 얼굴로 묘사되어 마치 익사한 시신처럼 보일 정도로 지극히 현실적이며 인간적이다. 반면 성모 주변의 슬픔에 잠긴 사도들과 머리를 숙이고 흐느끼는 막달라 마리아는 여느 종교화에서와 같은 과장된 감정을 노출하지 않고 되지 않고 슬픔을 각오한 듯한 차분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모의 시신이 놓인 침대는 화면 중앙에 비스듬히 배치되어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은 그림 속 인물들을 비추는 강렬한 조명을 보다 부각하여 시선의 집중도를 증폭하고 있다. 붉은 커튼은 마치 연극 무대의 막처럼, 죽음을 하나의 드라마적 사건으로 연출한 카라바조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제단화로 의뢰 받아 작업했지만, 성당을 운영한 가르멜 수도회는 작품을 인수하기를 거부했다. 가르멜 수도회는 이 작품을 거부한 것은 성모를 맨발의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묘사하고, 전통적인 파란 옷 대신 붉은 드레스를 입혔으며, 성모로 묘사된 그림의 모델이 로마의 유명한 직업여성과 닮았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교회로서는 이 작품이 동정녀 마리아의 신성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모독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 작품은 가톨릭교회로부터 거부를 당했지만, 후에 루벤스가 극찬하며 자신의 후원자에게 추천했고, 이후 루이 14세의 소장품이 되었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안착되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을 통해 성모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음 자체는 신성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현실이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정직함은 종교적 윤리가 강한 당시에는 불편한 진실이었으나 결국은 시대를 초월한 감동으로 아직도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모가 현재 튀르키에 지역 에페소에서 말년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전승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면 에페소는 어떤 곳이었을까?
에페소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는 처녀의 신이자 사냥과 출산, 생명의 수호자였다. 에페소 사람들은 아르테미스를 모신(신의 어머니)으로 숭배하고, 그녀의 신상은 많은 유방을 가진 어머니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 이유는 엄청난 규모의 크기와 함께, 건축적 아름다움, 종교적 상징성, 인간의 예술적 야망이 집약된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길이가 115m, 폭이 55m, 높이가 18m에 달하고 127개의 대리석 기둥이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신전 자체가 인간 세상의 균형과 조화를 표현한 예술물로서 아르테미스 여신에 대한 최고의 헌정이었던 것이다.
신전은 기원전 356년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러 불타고 말았다. 이후 로마 시대에 다시 재건되었으나 262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존 터틀 우드가 대영박물관의 후원으로 신전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여 이후 여러 학자가 신전의 존재와 문헌의 기록을 고증해 냈다.
신전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의 일부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성당 건축에 재사용되었고, 나머지는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지역을 살아온 인간들의 자긍심과 영원을 담은 신화의 꿈을 상징한 것이었다.
아르테미스와 성모와의 관계를 설명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성모 마리아가 모종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연상을 하는 것이 그리 엉뚱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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