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미켈란젤로가 1509년에 프레스코로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피렌체의 카프레세 마을에서 몰락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 관청의 공무원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에게 맡겨져 채석장에서 석공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자랐다. 이런 이유에서 인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3세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도미니코 기를란다요의 작업실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489년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메디치 가문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며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탐구하는 르네상스의 완성자로서 명성을 얻어 갔다.
그는 사교적이지 않고 독단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동료들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에 태어나 미켈란젤로 보다 23살 연장자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는 피렌체 출신의 동향(레오나르도 이름의 다 빈치는 빈치 출신이라는 뜻이며, 빈치는 피렌체의 시골 마을 중의 하나임)으로 상당 기간 활동이 겹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개인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기법과 방식에 관한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미술사적으로는 당대의 예술을 보다 풍부하게 한 발전적인 논쟁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예술세계가 회화, 과학, 해부학, 발명으로 요약된다면 미켈란젤로는 조각, 회화, 건축, 시로 대변된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르네상스의 철학은 두 사람 모두가 추구한 당대 예술의 이상향이었다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프랑스 출신 추기경 장 드 빌리에 드 그로라스의 요청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조각하여 교황청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헌정했다. 그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에타>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며 교황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청으로 교황청 화가로 입성하여 율리오 2세 교황 자신의 영묘(무덤)를 위한 조각 작업을 주도했다. 이 작업의 일부가 <모세상>으로, 압도적인 사실성과 감정의 표현으로 교황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모세의 근육, 옷의 주름, 눈빛의 분노까지 극도로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는데, 특히 모세의 손에 들린 십계명 판과 긴장된 자세는 신의 말씀을 지키려는 인간의 고뇌를 조각으로 구현한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도 부탁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이를 거절했다. 조각에 특화된 자신에게 천장화를 그리도록 한 것은 모종의 음모일 것이라고도 의심했다. 그러나 교황의 강력한 요청과 압박에 결국 이를 수락했다. 그는 처음에는 천정에 12 사도의 행적 정도를 그리기로 계획했으나 작업에 몰두하면서 기왕에 창세기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해 보겠다는 큰 꿈을 실현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천장 아래에 비계를 직접 설계하여 제작하고, 이에 매달려 고개를 젖힌 채 4년 동안이나 혼자서 작업을 계속한 끝에 결국〈아담의 창조> 등 예술 사상 가장 위대한 프레스코화를 남기게 된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은 40m x 13m의 약 500 m2 크기로 농구 코트 2개를 붙여놓은 것과 비슷하다. 미켈란젤로는 이 천장 중앙에 하느님이 아담에게 손을 뻗어 생명을 불어넣는 <아담의 창조>와 창세기의 9개 장면인 <천지창조>를 그리고, 외곽에는 예언자 7명과 무녀(sibyl) 5명, 창문 위와 천장 모서리 아치형 공간에는 구약 성서의 아브라함, 다윗 등 마태복음 1장에 열거된 예수 혈통의 조상들(구속사, 救贖史)을 그려 넣었다.
5명의 무녀 작품 중 한 폭이 <델포이의 무녀>다.
델포이의 무녀는 쿠마이(이탈리아)의 무녀, 리비아의 무녀, 페르시아의 무녀, 에리트리아의 무녀와 함께 다섯 무녀 중의 하나다. 무녀는 신탁을 전달하는 예언자를 말한다. 신전을 지키며 신의 계시나 말씀을 전해 듣고 이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들 무녀를 기독교의 중심 교회인 시스티나 천장으로 가져옴으로써, 기독교 이전의 신화의 세계를 지배한 신탁을 기독교적 메시아의 출현을 계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의 전달자로서 무녀를 하느님의 사제인 교황과 성직자의 무한한 능력과 지위에 귀속시킨 것이다.
아울러 다섯 무녀의 출신지는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리비아, 소아시아 등으로 이들은 메시아의 출현이라는 복음을 각자의 민족과 지역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기독교적 복음이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과 지역에 전해진다는 기독교의 포괄성을 강조한 것이다.
델포이(Delphi)는 고대 그리스에서 아폴론 신의 신탁이 전해지던 성지였으며, 그곳의 무녀는 피티아(Pythia)라는 이름으로 신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델포이의 무녀는 다섯 무녀 들 중에서도 특별히 보다 신비롭고 젊은 분위기로, 그녀의 동적인 자세와 깊은 시선은 가히 무속의 충만한 기를 발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무녀의 몸은 왼쪽으로 틀어져 있지만, 고개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눈동자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정지된 듯하면서도 동적인 긴장감을 준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깊은 눈빛은 무언가를 예언하거나 깨달은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녀 주변에 배치된 천사들은 지구를 짊어진 아틀라스처럼 묘사되어, 인간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들이다.
신화는 델포이의 무녀 피티아의 신탁이 언제나 구체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해석에 따라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리디아(지금의 튀르키에 서부)의 부유한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앞두고 피티아에게 물었다.
“내가 전쟁을 벌이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
피티아가 답했다.
“큰 왕국 하나가 무너질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가 망할 것이라고 믿고 전쟁을 감행했지만 결국 무너진 것은 그의 리디아 왕국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전을 방문하고 피티아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피티아는 신탁을 받고,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깊은 혼란과 의문에 빠졌다.
“나는 내가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신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는데---”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을 직접 찾아 나섰다. 철학적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는 많은 정치가, 시인, 장인들과 대화하며 그들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파티아의 신탁이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는 의미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철학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는 철학적 태도의 기초가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고 델포이 신탁을 찾았지만,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도망쳤다. 결국 오이디푸스에게는 신탁이 예언한 모든 일이 이루어지며 비극이 시작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완성한 이후에도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등과 협력하에 교황청 예술화 작업에 깊이 관여하고, 로마를 르네상스 예술의 성지로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하여 건축가로서의 업적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8일 88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하고 그의 시신은 피렌체로 옮겨져 성대한 장례 의식에 따라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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