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1483년 작품이다. 높이 2미터 가로 2.8미터 크기의 프레스코(fresco)화다. 루브르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프레스코화는 석회질의 벽면(인토나코)에 색을 내는 안료를 물에 섞어 칠하는 방식의 그림이다. 안료가 석회에 녹아들어 말라 굳어지는데, 내구성이 강하여 수백 년이 지나도 변색 없이 유지된다.
보티첼리는 1445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알레산드로 필리페피였는데, 보티첼리(작은 술통)라는 이름은 그의 형의 별명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형은 금세공 기술자로 일했는데 체형이 술통처럼 땅딸하고 배불뚝이여서 동생까지도 보티첼리 형제라고 부른 것이다. 실제로 보티첼리도 어린 시절 형과 함께 금세공 기술을 배우다 그림으로 전향했다.
보티첼리는 면보다 선을 중시한 화가로, 그의 선은 부드럽고 유려하여 화폭 전체가 오페라의 한 소절처럼 흘러내렸다. 그림의 소재는 주로 신화와 종교의 의미를 재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신과 인간의 균형된 자세와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보티첼리의 미술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재능을 인정한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피렌체에서 모직물을 거래하는 중산층 상인 가문으로 출발했으나 14세기 후반부터 금융업을 시작하여 조반니 메디치가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로마 교황청과도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 등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하며 이탈리아의 종교와 정치를 조정하는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부상했다.
메디치 가문의 핵심 인물로서 사실상 피렌체를 통치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예술과 철학의 후원자로서도 명성을 얻어 ‘위대한 로렌초’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보티첼리 이외에도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해 고대 철학을 부흥시키고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메디치 가문의 은행업을 관장한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는 그의 아들 로렌초를 메디치 가문과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알비치 가문의 조반나와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보티첼리에게 자신의 별장인 빌라 렘미(Villa Lemmi)의 벽을 장식할 벽화를 그리도록 주문했다. 보티첼리에게 의뢰했다. 이에 보티첼리는 빌라 렘미의 벽화로 여러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이 중의 하나가 <젊은 여인에게 선물하는 비너스와 삼미신>이다.
그림에는 비너스와 삼미신, 그리고 젊은 여인과 큐피드가 등장한다. 젊은 여인은 당연히 신부인 조반나이고 큐피드는 사랑의 신으로서 그녀의 결혼을 축복하고 있다. 비너스와 삼미신도 조반나를 축하하는 하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티첼리는 작품의 제목에서와 같이 큐피드보다는 비너스와 삼미신에게 더 높은 하객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비너스는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를 로마 신화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 신이 아버지 우라노스 신을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거세하여 그 성기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생긴 거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우라노스는 하늘의 신으로서 땅의 여신 가이아와 결혼하여 아들 신들을 탄생시킨 최고의 조상신이다. 우라노스는 처음의 남성 신이기에 그의 아버지 신은 없다. 신화는 우라노스도 가이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우라노스는 가이아의 남편이자 가이아의 아들인 것이다.
우라노스가 가이아와 낳은 1세대 신들은 티탄 12신(막내가 크로노스), 키클롭스(외눈 거인), 헤카톤케이레스(백팔 거인) 등으로 모두가 엄청난 힘과 거대한 힘을 지닌 흉악스러운 거인의 모습이었다.
우라노스는 괴물과도 같은 자식들이 자신에게 반항할 경우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식 중에서 가장 흉측한 녀석들은 태어나자마자 타르타로스라는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부인 가이아는 자식들이 남편 우라노스로부터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있다고 분노하여 우라노스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가이아는 자식들에게 우라노스를 없애자고 제안했는데 다른 자식들은 아버지 편을 들어 거부한 반면 막내 크로노스만이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거대한 낫을 만들어 날카롭게 날을 세워주고, 우라노스가 자신과 관계를 하려 할 때 기습적으로 생식기를 잘라버리라고 지시했다.
크로노스에 의해 잘린 우라노스의 성기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거품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아프로디테, 즉 비너스가 탄생했다. 비너스는 잘린 생명력에서 피어오른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는 아프로디테가 사랑의 신답게 감정의 기복이 크고, 질투와 분노가 강한 여신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 헤파이스토스가 있었음에도 아레스(전쟁의 신)와 불륜을 저지르고, 신이 아닌 인간 남성들과도 사랑에 빠지는 등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다. 또한 자신의 사랑을 모욕하면 저주를 내리고, 자신이 갈망하는 사랑은 기적처럼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사랑의 재주꾼이기도 했다.
인간 세상에서 키프로스 섬의 왕이자 뛰어난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성에게는 실망감과 혐오감을 가지고 독신을 고집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자신의 이상형을 상아로 조각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여인 상이 너무도 완벽한데 놀란 나머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아프로디테에게 그 조각상과 똑같은 여인을 아내로 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프로디테는 그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피그말리온은 이 여인과 결혼하여 파포스(Paphos)라는 딸을 낳았는데, 파포스는 키프로스의 도시 이름으로도 전승되고 있다.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 이를 각색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참조)
로마의 신 비너스는 단순한 미의 여신에 더해 국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녀는 승리의 여신(Venus Victrix), 행운의 여신(Venus Felix), 순결의 수호자(Venus Verticordia) 등 다양한 모습으로 숭배되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비너스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비너스 제네트릭스(어머니)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면 삼미신은 누구인가?
삼미신(The Three Graces)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 모두에 등장하는, 아글라이아(Aglaia, 광휘의 신), 에우프로시네(Euphrosyne, 기쁨의 신), 탈리아(Thalia, 풍요의 신) 등 세 명의 아름다운 여신을 말한다.
이들은 신과 인간 모두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여신의 대명사로, 단독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비너스와 아폴론을 수행하는 조연의 역할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의 품격과 덕성을 갖춘 이상적인 여성상을 구현하는 사랑의 축복자로 상징되고 있다.
보티첼리는 <젊은 여인에게 선물하는 비너스와 삼미신>에서 신부 조반나 알비치에게 사랑, 결혼, 축복, 탄생이라는 최상의 고귀한 선물을 전달하는 최고의 하객으로 큐피드는 물론이고 삼미신과 비너스를 모두 동원한 것이다. 후원자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화가다.
그는 우라노스의 생식기로 상징되는 조개껍질 위에 서서 지상으로 떠오르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다.
그의 작품 <봄>(Primavera)에서는 비너스의 정원에서 비너스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춤을 추는 삼미신이 등장한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 그림 우측의 비너스 제피로스와 클로리스가 뿔 달린 모습으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대비시켜 삼미신의 아름다운 춤을 지고지순한 정신적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피렌체 사교계를 주도한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연인이자 보티첼리의 이상형이기도 했는데, 학자들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목선이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시모네타의 병약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분석했다. 보티첼리는 자신이 죽으면 시모네타가 묻힌 옆자리에 묻히길 원했다고도 한다.
비너스는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 당대에도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잿더미로 묻힌 폼페이에서도 비너스의 벽화가 여럿 발견되었다. 폼페이 벽화 속의 비너스는 때로는 옷을 입은 여왕처럼, 때로는 완전한 누드로 묘사되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여성상을 대변하고 있다.
1800년대에 그리스 밀로스에서 우연히 발견된 비너스상은 팔이 없는 상태의 반나의 모습이다. 이는 기원전 100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현대인의 시선으로도 여성의 이상적 고전미의 정수로 여겨지고 있다. 루브르에 전시 중이다.
중세를 살았던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고대인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비너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미적 감각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예술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티첼리는 후에 바티칸의 초청을 받아 시스티나 성당 벽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바티칸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화가들의 실력을 인정하여 보티첼리를 우선순위로 선발했던 것이다. 그는 성당 벽에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미켈란젤로보다 30년 앞선 시기였다.
보티첼리는 말년에 사보나롤라 수사의 금욕주의 설교에 영향을 받고 자신이 그린 누드를 불태우고 종교적 소재를 찾아 나섰다. 단테의 ‘신곡’ 삽화 작업에 몰두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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