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세바스티아누스 - 고통의 인문주의, 주이상스의 미학

명화는 혁명을 말한다

by 다두


Andrea Mantegna - St Sebastian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작품으로 2.5미터 x 1.4미터의 캔버스에 템페라와 오일로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만테냐는 이탈리아 파도바의 이솔라 디 칼투로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11살에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Francesco Squarcione)의 화실에 수습생으로 들어가 그림 훈련을 받았다. 그의 스승 스콰르치오네는 고대 로마 미술품을 수집하고 복제하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람으로 만테냐도 자연스레 그의 영향을 받아 고전주의적 조형 감각과 원근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이 로마의 조각상과 유사한 볼륨감을 과시하고 있는 이유다.


1456년 만테냐는 파도바 인근 도시 만토바를 통치하고 있던 루도비코 3세 곤자가(Ludovico III Gonzaga)에 의해 그의 듀칼레 궁정(Corte)의 화가로 선발되었다.


만토바를 통치한 곤자가 가문은 만토바의 토착 귀족 가문으로 1328년부터 1708년까지 무려 380년간이나 만토바를 통치한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도시별로 토착 귀족 가문이 영주와 다름없이 군사력과 토지를 소유하고 정치적 자치권을 행사했다. 만토바의 곤자가 가문은 이러한 유력 귀족 가문 중의 하나였다.


곤자가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정략결혼으로 가세를 확장하고, 신성로마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던 로마 교황청을 지원하여 여러 명의 추기경과 주교를 배출하며 유럽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부상하는 한편 축적된 권세와 부를 이용하여 예술 분야에서도 막강한 후원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만토바는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낀 작은 도시로 군사적으로나 경제력으로 항상 이들의 뒷전에 있었는데, 곤자가 가문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품격과 교양을 갖춘 ‘문화적 귀족’으로 거듭나기를 추구한 것이었다.


곤자가 가문이 후원한 예술 분야는 단지 미술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560년대 만포바를 통치한 빈첸초 곤자가는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메디치 가문의 결혼 축하 공연에 초청받아 오페라를 관람한 후 오페라에 심취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몬테베르디를 자신의 궁정 음악가로 초빙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마다 만토바에서 초연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만토바의 곤자가 가문의 궁정은 단순한 정치의 공간이 아니라, 화가, 음악가, 시인들이 모여든, 명실공히 예술의 실험실이 되어 있었다. 특히 듀칼레 궁정 자체도 곤자가 가문의 권력과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당대의 대표적 건축물 중의 하나였다.


만테냐는 듀칼레 궁전의 루도비코 곤자가의 침실 겸 접견실을 ‘부부의 방(Camera degli Sposi)’이라는 벽화로 가득 채웠다. 벽화는 10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부부의 방의 북쪽 벽은 궁정의 모습으로 곤자가 가문의 가족과 측근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서쪽 벽은 만남의 장면으로 루도비코가 외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천장의 중앙에는 둥근 원형 창문(Oculus)을 눈속임 그림으로 그리고, 창틀에는 궁정 여인들과 천사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 중에는 흑인 무어인과 공작새도 포함되어 있어 이국적이고 유희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aint Sebastian)의 주인공 세바스티아누스는 고대 로마제국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근위 장교였다. 그는 당시 기독교를 부정하는 제국의 칙령을 거역하고 몰래 기독교 신자들을 도와주다 발각되어 황제의 명령으로 기둥에 묶인 채 수많은 화살을 맞고 왕궁 밖으로 버려진다.


주변을 지나가던 기독교인 여성 이레네(St. Irene)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진 세바스티아누스를 발견하고 몰래 데려가 화살의 상처를 씻고 약초로 치료하여 세바스티아누스를 기적처럼 살려냈다. 회복된 세바스티아누스는 다시 황제에게 나아가 기독교 박해를 비판하며 항의하다 황제 근위대의 몽둥이를 맞고 최후를 맞는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로마 교황청은 세바스티아누스를 순교 성인으로 서품 하고, 교황 다마소 1세는 그의 묘지 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을 지어 봉헌하기도 했다.


중세 말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할 때 사람들은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역병과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성인으로 숭배했다. 중세 사람들은 전염병을 신의 저주를 받은 독화살로 인식했으며,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화살을 맞고도 살아난 순교자라는 점에서 역병을 막아주는 초자연적 보호자로 여겨진 것이다.


만테나는 고대 조각을 연구한 화가답게 성 세바스티나의 벗은 몸을 근육질의 이상적 남성미로 표현했다. 수많은 화살을 맞고 있음에도 세바스티나의 자세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조각 작품에서 인물을 균형 잡힌 모습으로 훤칠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탄탄하게 그렸다. 세바스티나는 코린트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 기둥에 묶여 있고 배경에는 파괴된 로마 조각상과 건축물이 원근법의 단축법(Foreshortening) 즉, 관찰자의 시각으로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가까운 것은 크게 입체감을 살리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미술사는 만테나의 ‘성 세바스티나’를 완숙된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르네상스 미술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 능력을 중시하는 인문주의(Humanism)가 부상함에 따라, 미술도 신의 무감정한 표상이 아니라 희로애락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실제 감정을 그려내는 화풍이다. 또한, 천상의 신비를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조각과 건축과 철학을 연구하여 그 안에 담긴 조형미, 비례미, 균형미를 보이는 사실 그대로(묘사, 원근법, 명암법 등) 그리는 기법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곤자가와 같은 명문 가문들이 예술을 신의 범주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영역으로서 존중하고 후원하고, 만테나와 같은 자유로운 사상의 화가가 미술을 신학의 범위를 넘어 인간과 현실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발전시킨 결과물인 것이다.


일부 현대 평론가들은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관음적 시선(voyeuristic gaze)이나 동성애의 상징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그림 속의 세바스티아누스가 근육질의 반나체로 묘사되며, 고통 속에서도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콘트라포스토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재해석한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 이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이상스는 인간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고통이 무의식적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한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은 일부 현대 예술 소재이기도 한, 고통스러운 사랑이지만 놓지 못하거나,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자기 파괴적 행동을 반복하는 등의 복합된 욕망의 본질을 고민하고 분석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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