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의 오상 - 르네상스의 문을 열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Giotto – St. Francis Receiving the Stigmata <Wikimedia Commons>

조토((Giotto di Bondone)의 1290년 작품이다. 3미터 x 1.5미터의 큰 나무판에 템페라로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템페라는 색을 내는 안료가 떨어지지 않고 캔버스에 잘 붙을 수 있도록 달걀노른자를 물에 타 안료와 섞어 만든 물감을 말한다.


조토는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베스피냐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 치마부에(Cimabue)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양식에서 탈피하여 인물의 감정, 공간에 입체감을 표현한 그림을 그린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비잔틴 양식이란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한 동로마제국 시대의 기독교적 화풍을 말한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예술을 신앙의 도구로 삼고, 사람의 세계보다는 신의 세계를, 지상보다는 천상의 세계를, 인간의 개성보다는 신의 절대성을 그리도록 했다. 그림은 주로 성당의 벽화나 제단 위에 유리나 보석의 조각을 붙인 모자이크 방식으로 그려져 자연광에도 쉽게 반짝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림의 대상은 세속의 인간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 예수, 성인 등의 모습이었으며, 이것도 성서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여 정형화된 도상(icon, 그림 속의 일관된 상징)을 양산했다. 상징은 과장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림 속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눈과 손은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크게 그렸다. 큰 눈은 영적 통찰을 상징하고 큰 손은 축복과 기도와 권위의 기독교 신앙을 대변한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때의 작품들은 모두 한 사람 작품의 복제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토는 영적 상징을 표현하기보다는 현존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그의 감정과 배경의 이야기를 그렸다.


조토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상부 성당(Basilica Superiore)에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28장면으로 구성한 서사적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주도했다. 벽화는 중세의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가 쓴 ‘성 프란체스코 대전기’를 바탕으로, 신앙, 고난, 자비, 자연, 초월로 대변되는 프란체스코의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와 사후의 기적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 그려냈다.


루브르에 전시된 ‘성 프란체스코의 오상’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스물여덟 개의 연작 중 열아홉 번째의 장면과 동일한 내용의 작품으로 조토가 별도로 이동 가능한 나무판에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1224년 프란체스코가 라 베르나 산에서 40일간 단식기도를 하던 중 하늘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 천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다가와 예수의 다섯 상처(손, 발, 옆구리)를 그대로 프란체스코의 몸에 옮겨주는 기적을 체험한 사실을 그리고 있다.


그림 속의 프란체스코는 여윈 얼굴로 헐렁한 수도복을 입고 고행 중에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세라핌 천사는 빛나는 날개를 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현현(顯現) 하고, 예수의 상처에서 나오는 빛줄기가 프란체스코의 몸으로 이어져 다섯 상처를 옮겨 놓는다.


프란체스코는 ‘작은 형제회’(OFM ; Ordo Fratrum Minorum)라는 이름의 수도원을 창설하고 겸손과 청빈, 섬김을 실천하며 예수처럼 가난한 자, 병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수도회가 차츰 커지면서 일부 형제들이 청빈의 정신을 경시하게 되고 교황청은 세속적 방식에 따라 수도원을 운영토록 요구함에 따라 프란체스코는 신앙의 본질에 관해 번민하며 산으로 올라가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토는 프란체스코의 신앙적 깊이만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갈등과 고뇌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미술사는 조토를 중세의 끝자락에 서서 르네상스의 문을 두드린 혁명가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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