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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해 Apr 17. 2022

계속 되는 영웅수집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I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이어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를 읽어보았어요. 이번에는 2명의 영웅들이 수집되었답니다. 특히 카이사르가 인상 깊었어요. 이번엔 책 표지 찍는 걸 깜빡해서 표지가 없어요.





@크라수스


p.36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장군 수레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키가 훨씬 크고 풍채가 뛰어났다. 그러나 여자처럼 곱게 생긴 데다가 화려한 옷을 입고, 얼굴에 분도 바르고, 머리에 메디아 식으로 가르마를 타서 넘겼기 때문에 용맹스러운 장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한편, 병사들은 스키타이 풍속대로 긴 머리를 앞이마에 흩어놓아서 보는 사람을 몹시 두렵게 만들었다.




@세르토리우스


p.57

향기로운 식물에서 이름을 빌려온 도시가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은 오랑캐꽃에서 이름을 따온 이오스이고, 다른 한 곳은 몰약의 스미르나였다. 그런데 이 두 곳 중 한 곳에서 시인 호메로스가 태어났고, 다른 한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p.60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무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창이나 왕관 같은 것들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언제나 지니고 다닐 수 없지요. 하지만 나의 용맹과 명예를 나타내는 표시는 언제나 내 몸과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잃은 한쪽 눈입니다. 그래서 내 눈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가진 용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p.63

"나는 지금 시간을 사려는 것이다. 지금은 통행세를 주어 빨리 가는 것이 시간을 사는 것이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간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p.68

사슴은 그가 부르면 즉시 달려오고, 전쟁터까지도 겁 없이 따라다녔다. 그는 한 가지 꾀를 생각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사슴을 달의 여신 디아나가 준 것이고 사슴이 자신에게 몇 가지 비밀을 이야기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미개인들이 미신을 잘 믿는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미개인들은 달의 신이 비밀을 알려 주는 사슴을 세르토리우스에게 주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더욱 신뢰했다. 그는 사슴의 머리에 꽃관을 씌운 후 군중들 앞에서 병사를 격려하기도 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이제 곧 승전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오. 그것은 확실하오. 우리는 이 반가운 승전 소식을 축하하기 위해 미리 잔치를 열고 신들에게 제사를 지냅시다."


p.70

스페인군을 더욱 기쁘게 한 것은 그들의 자식들을 위한 세르토리우스의 노력이었다. 그는 각 마을에서 명문가의 아이들을 오스카라는 큰 도시에 불러들여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 아이들은 빨간 단을 두른 긴 옷을 아름답게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 모습을 본 부모들은 매우 기뻐했고, 그 기쁨은 세르토리우스에 대한 깊은 존경으로 되돌아왔다.




@아게실라오스


p.126

아게실라오스의 아시아 원정은 다시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아게실라오스는 그 시대 최고의 인물이 되어 있었고, 검소한 생활과 덕행은 그의 명성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군사령부를 떠나 있는 동안 언제나 신전에서 잠을 잠으로써,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모두 신을 증인으로 했다. 그는 수 천명의 그리스 병사들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침구를 썼다. 그는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참고 견디며 신이 어떤 날씨를 내려주어도 그것을 모두 즐겁게 받아들였다.

아시아에 사는 그리스 시민에게 그의 존재는 특히 돋보였다. 페르시아의 통치자들이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잔인한 정치를 하다가도, 초라한 몰골의 아게실라오스 왕 앞에서는 벌벌 떠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몹시 신이 났다. 그리스 시민들은 티모테우스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스의 왕은 군신 아레스.

그리스는 결코 황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p.144

크세노폰은 위대한 사람의 말은 그것이 농담이나 술에 취했을 때 나온 것이라도 모두 마음에 새겨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용감한 사람들이 불행에 빠졌을 때 드러내 보이는 말이나 행동들도 후세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p.149

그의 아들 아르키다모스는 시칠리아의 디오니시오스에게 군대를 얻어 아르카디아 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흔히 '눈물 없는 전투'로 알려져 있는데 , 한 사람의 스파르타 병사도 잃지 않고 수많은 적을 죽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p.154

"내가 염려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전략이라는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전략을 써봐야 먹히지를 않습니다. 전략이라는 것은 이쪽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적들을 다른 쪽에서 갑자기 공격하는 것인데, 아무런 생각도 없는 저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씨름꾼이라도 꼿꼿하게 가만히 서 있는 상대에게는 기술을 걸 수가 없는 것처럼 저들도 마찬가지란 말이오."


p.155

84세, 스파르타 왕으로 오른 지 41년이 되어 눈을 감았다. 이 41년 중 30년 동안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지위를 누린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하기 전까지 그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그리스 전체의 왕이었으며, 존경받는 총사령관이었다.




@폼페이우스


p.157

폼페이우스의 아버지 스트라보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심한 미움을 샀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폼페이우스에게는 그런 원한이나 증오심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p.158

절제 있는 생활 태도와 전쟁에서 보여준 능숙한 기량, 뛰어난 연설과 성실한 마음, 그리고 언제나 친절한 태도. 그는 다른 사람이 부탁하면 언제나 밝은 얼굴로 들어주었고, 끝까지 노력했다. 그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으며, 은혜를 베풀 때도 전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의 도움을 받을 때도 언제나 위엄과 명예를 잃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훌륭한 체격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아름다운 표정과 위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중후해지고 왕자다운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의 머리카락은 약간 곱슬로 물결을 지어 흐르고, 눈은 부드러운 광채를 띠었다.


p.161

탈라시우스와 그의 아내 탈라시오의 결혼 생활은 아주 행복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결혼을 할 때마다 그런 행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탈라시오"를 외치게 되었다고 한다.


p.162

폼페이우스는 그때 겨우 스물세 살이었지만, 스스로 군대를 다스릴 만한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권력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p.164

술라는 그 뒤에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태도로 폼페이우스를 대했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자기를 찾아올 때면 언제나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술라의 주위에는 여러 장군들이 있었지만, 그는 누구도 폼페이우스에게처럼 정중한 대우를 해준 일이 없었다. 그는 이 청년의 뛰어난 용기와 힘에 감탄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큰 기둥으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우쭐대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p.184

아테네의 성문을 나오면서 그는 두 줄의 시가 걸려 있는 ㄴ것을 보았다. 안쪽과 바깥쪽에 걸려 있는 이 두 시에는 각각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대의 겸손한 마음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낮추지만

그것은 그대를 더욱 신과 가까이 만든다오.

그대를 기쁨으로 맞았던 우리들은

이제 그대가 떠나는 길에 축복을 드리네.


p.185

폼페이우스는 해적들을 모두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대로 놓아 보내기에는 숫자도 너무 많았고 사람도 잘하며 동지들도 많으니 곧 다시 뭉쳐 나쁜 짓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란 원래 포악하고 비사회적인 동물이 아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 나쁜 습관들에 물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는 곳과 방식이 달라지면 성격도 달라지는 것이다. 사나운 야수도 온순하게 길을 들이면 사나운 습성을 버리게 되는 것처럼."

폼페이우스는 포로들을 바다에서 육지로 이동시켜 도시나 시골에 모여 살게 해서 고요한 성품으로 바꾸어 보기로 했다.


p.188

"전쟁은 언제 끝날까? 평생 전쟁이나 하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권력을 얻기보다 차라리 아내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살림이나 하는, 아무 이름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를 보며 가장 친한 친구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그 말을 듣고는 모두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p.191

미트리다테스 곁에는 겨우 세 사람이 남았다. 그중 하나는 히프시크라티아라는 애첩이었는데, 용맹스럽고 과감한 정신을 가진 그녀는 어떤 급한 상황에는 대장부 같은 용기를 보여줬다. 그녀는 페르시아 기병 같은 옷차림을 하고 말을 탄 채 달리고 있었다. 기나긴 여행 중에도 전혀 피로한 빛을 보이지 않고 왕의 시중까지 들었다. 그렇게 해서 왕의 일행은 마침내 시노리아에 닿았다. 시노리아에는 왕의 재산과 보물들을 간직한 성이 있었다. 성에 도착한 미트리다테스는 값진 보물들을 꺼내서 지금까지 줄곧 자기를 따라온 부하에게 나눠주었다.


p.195

스트라토니케는 자기가 관리하던 성과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는 신전을 장식하거나 개선식에 들고나갈 만한 물건들만 받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주었다. 이베리아 왕이 내놓은 물건에 대해서도 똑같이 했다. 왕은 금으로 만든 침대와 식탁, 그리고 의자를 바쳤지만, 폼페이우스는 그것들을 모두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국고에 집어넣었다.


p.202

개선식의 제일 선두에는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나라의 이름이 적힌 명패들이 섰다. 폰토스,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카플라고니아, 메디아, 콜키스, 이베리아족, 알바니아족, 시리아, 킬리키아,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팔레스티나, 유대, 아라비아, 그리고 바다에서 정복한 해적 등이 적혀있었다.

이들 나라에서 점령한 것이 요새만 해도 천 개를 넘었으며, 도시도 9백 개나 되었다. 또 해적선 8백 척을 획득했고, 새로 세운 도시만 39개나 되었다. 이들 명패에는 공물에 대한 명세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원정을 떠나기 전에 5천만 달렌트를 넘지 않던 국가수입이 이 많은 나라를 정복한 후 8천5백만 달렌트의 세입을 추가로 덧붙이게 되었다.

그는 개선식을 3번이나 했다. 첫 번째 개선식에서 아프리카 정복을, 두 번째 개선식에서 유럽 정복을, 그리고 세 번째 개선식으로 아시아 정복을 기념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p.210

그가 아내를 그만큼 사랑했는지 아니면 아내가 그를 그만큼 사랑했는지 혹은 아내를 두고 차마 먼 곳으로 떠날 수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폼페이우스에 대한 아내의 지극한 사랑은 유명했다. 아내가 그를 그렇게 사랑한 것은 폼페이우스가 다른 여자들을 절대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평소의 위엄 있는 태도와 함께 집에서는 우아함과 부드러움도 보여 주었다. 그가 여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는 기생 플로라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p.213

폼페이우스는 카토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정치를 하는 데 많은 충고를 부탁한다고 했다. 카토는 이렇게 답했다.

"폼페이우스!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전혀 없소.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은 나라를 위한 것이지 당신을 위한 건 아니었소. 그리고 충고를 해 달라고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공개석상에서 충분히 내 생각을 말씀드릴 것이오."

카토는 모든 일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p.218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영토가 경계선에 있는 루비콘 강에 아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지금 결행할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묵묵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렵다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p.221

티디우스 섹스티우스라는 늙은 절름발이도 이 가운데 있었는데, 처음에 그가 마케도니아까지 찾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맞이했다. "이렇게 늙고 병든 몸으로 안전을 버리고 위험을 찾아 여기까지 오시다니, 저는 다만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p.226

"공격력이라는 것은 적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폼페이우스는 그런 명령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힘을 꺾었을 뿐 아니라 부하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려 버렸던 것이다. 용기는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군대가 성난 파도처럼 함성을 지르며 돌진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폼페이우스는 병사들을 자기의 위치에 못 박아 놓음으로써 그 기운을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p.226

만일 두 사람이 각자가 얻은 것에 조용히 만족했더라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바다와 육지들이 모두 그들 손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승리와 정복을 거듭하고 싶은 욕심에 굶주린 것이라면, 파르티아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충분히 만족을 얻었을 것이다. 스키타이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인도도 남아 있었다.


p.228

폼페이우스는 진지를 버리고 얼마쯤 가서 말을 버린 다음 몇몇 부하들과 함께 걸어갔다. 그들은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깊이 잠겼다. 지나간 34년 동안 오직 승리와 정복만을 거듭해 온 그는 이제 나이가 든 다음에야 난생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고 도망가는 운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전투로 얻었던 명성과 권세를 단 한순간에 잃어버린 데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부하와 무기의 보호를 받고 있던 자신이 이렇게 초라한 꼴로 도망을 치게 되어, 바로 곁에 서 있던 적들조차 알아보지 못할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p.229

폼페이우스는 자기를 따르던 노예들을 아무 걱정 말고 카이사르에게 가서 잘 살라며 돌려보내고 자유민만을 태웠다.

p.231

카토는 군대를 모아 아프리카로 건너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닫고, 훨씬 우세한 해군을 이용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육군만을 내세웠던 자신을 원망했다.


p.234

코르넬리아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예감하고 슬프게 통곡했다. 폼페이우스는 백인 대장 두 사람과 필리푸스라는 해방 노예, 그리고 시키테스라는 노예를 이집트 인의 배에 먼저 태웠다. 폼페이우스는 아들과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포클레스의 시를 되풀이해서 읊었다.

폭군의 문을 들어서는 길은

자유를 버리고 노예가 되는 길.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배에 올랐다. 육지까지 상당히 멀었다. 그러나 가는 동안 배에 탄 누구도 고에게 따뜻한 우정이나 환영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좀 더 편하게 앉으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셉티미우스의 칼이 폼페이우스의 등을 찔렀다. 그의 나이는 59세였으며, 생일을 하루 지난 때였다.




@알렉산드로스


p.245

알렉산드로스는 오직 리시포스에게만 그의 조각상을 만들게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특징적인 모습을 그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머리를 왼쪽 어깨로 약간 기울인 채 유난히 눈을 빛내던 모습이 아주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리스토크세노스의 기록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고, 옷과 숨결에도 훈훈한 향기가 배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체질이 뜨거운 데다가 비쩍 말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테오프라스토스 학설에 의하면 모든 향기는 열이 습기에 작용을 할 때 증발되면서 생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무더운 지역에서 좋은 향료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알렉산드로스가 술독에 빠지고, 성질이 불 같았던 것도 모두 이 뜨거운 체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p.246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p.248

왕자를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말을 보며 왕과 신하들은 손에 땀을 쥔 채 침을 삼켰다. 잠시 후 알렉산드로스는 유쾌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필리포스 왕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알렉산드로스를 맞았다. "내 아들아, 너는 너에게 알맞은 왕국을 찾도록 해라. 마케도니아는 네게 너무나 좁다."


p.249

그 시대의 가장 이름 높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으로 모셔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윤리와 정치뿐만 아니라 소요학파라는 명칭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깊고 심오한 이치들도 가르쳤다. 알렉산드로스는 의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 그는 천성적으로 모든 학문과 함께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향갑판을 항상 갖고 다닐 수 있는 군사학의 보물창고라고 했으며, 잠들 때에도 언제나 칼과 함께 베개 밑에 두었다. 그는 아시아에 가 있을 때도 <일리아드> 말고는 다른 책이 없어 하르팔로스에게 책을 좀 보내 달라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높이 존경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지만, 그분은 보람 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친아버지와 똑같이 존경했다.


p.255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햇볕을 쬐며 누워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가자 그는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몹시 귀찮은 듯 왕을 쳐다봤다. 알렉산드로스는 정중한 말씨로 인사를 건네고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햇빛이 가려지지 않게 저쪽으로 조금만 비켜 주셨으면 하오."

알렉산드로스는 몹시 놀랐다. 자기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의 넓고 큰 도량에 감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을 떠나며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소."


p.265

그는 술을 그렇게 많이 즐기지도 않았다. 술을 마실 때도 술보다 이야기를 더 즐겼기에 한잔을 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술을 많이 마셨다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술도, 잠도, 여자도, 구경거리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그 일에만 사로잡혀 열중했다. 그렇기에 그는 짧은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p.276

가우가멜라는 페르시아 말로 낙타의 집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페르시아의 어느 왕이 적에게 쫓기다가 낙타가 잘 달려준 덕에 생명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왕은 이 낙타를 위해 집을 지어 주고, 그 땅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낙타의 먹이를 사줬다. 그다음부터 이 땅은 낙타의 집, 가우가멜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p.304

알렉산드로스는 언제나 운명과 함께 닥쳐오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냈다 '용감한 사람에게는 결코 불가능이란 없으며, 비겁한 자에게는 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p.311

세 번째 사람에게는 가장 영리한 짐승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직 인간의 눈에 발견되지 못한 짐승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 사람에게, 인간은 얼마 동안 사는 것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까지요."




@카이사르


p.327

"그렇게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고, 한 손가락으로 머리를 만지던 사람이 로마의 정권을 뒤엎을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p.328

카이사르는 씀씀이가 헤퍼서 관직을 얻기도 전에 1,300달렌트나 되는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가 돈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려 한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이런 행동은 적은 투자로 커다란 결과를 얻는 것이었다.


p.334

카이사르는 부하들의 농담을 엿듣게 되었다. "이런 데는 명예나 권력을 위해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이 말에 카이사르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로마에서 2인자로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왕이 되는 것을 선택하겠소."

스페인에 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휴식 시간에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읽었던 카이사르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친구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아, 정말 슬픈 일이오. 알렉산드로스는 나보다도 젊은 나이에 그렇게 많은 나라들을 무너뜨렸는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말이오."


p.336

그 옛날의 파비우스, 스키피오, 메텔루스를 비롯해 시대를 바꾸어 카이사르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술라, 마리우스, 루쿨루스 형제 등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명성이나 장군으로서의 인품에 있어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이름이 하늘에 닿을 만큼 위대하다는 평을 받았던 폼페이우스와 비교해도 역시 그의 능력이 더욱 뛰어났다. 먼저 그가 싸운 곳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그가 정복한 지역도 매우 광대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민족들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부하들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장군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하들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충성을 받았다. 다른 장군의 부하로 있을 때는 평범한 병사였지만, 카이사르의 부하가 되면 그의 명령에는 목숨을 내걸고 맨 앞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p.338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재산과 명예를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는 결코 싸워서 얻은 재물들을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챙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훌륭한 일을 한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기 위해 재물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하들이 부자면 자신도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도 장군이라 해서 그 일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카이사르의 체력이 몹시 약한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원래 자그마한 체격에 부드럽고 고운 살결을 가졌다. 게다가 심한 두통과 간질병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쁜 신체 조건을 핑계로 힘든 일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병의 치료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힘든 행군이나 초라한 식사도 마다하지 않았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일이 많았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밤에는 전차나 가마 속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낮에는 여러 요새나 도시, 병사들이 사는 곳까지 살펴보았다. 카이사르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매우 잘 타서 두 손을 뒤로 돌리고도 아주 빨리 달릴 수 있었다.


p.338 

그의 식사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밀라노에서 발레리우스 레오의 초대를 받아 저녁 식사에 참석했는데 상 위에 아스파라거스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먹는 기름이 아닌 몸에 바르는 기름이 뿌려져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음식을 아무 말 없이 먹고 있었다.


p.339

폭풍우를 만나 들어간 가난한 시골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명예로운 자리는 위대한 인물에게 주고, 편안한 자리는 약한 자에게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오."라며, 병자인 오피우스를 방에서 자게 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과 함께 처마 밑에서 밤을 지냈다.


p.350

카이사르의 부하로서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로 라비에누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마저도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를 따라갔다. 그러자 카이사르를 라비에누스의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그에게 보내 주었다.


p.359

카이사르는 로마에 있는 친구 마티우스에게 이 전쟁을 알리기 위해 짧게 단 세 마디를 적어 보냈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이겼노라."


p.365

카이사르는 가장 우수한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을 모아서 이 문제를 의논하고, 여기서 나온 여러 방법들을 잘 정리하여 한층 정확한 달력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로마에서 사용되고 있는 달력이며, 다른 어느 나라의 것보다 정확하다. 


p.372

카이사르는 스물세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음모자들도 카이사르를 공격하느라고 한 덩어리가 되는 바람에 서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


p.373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펼쳐보니, 그가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많은 재산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시체가 수많은 상처를 입은 채 들려 나가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시민들은 의자나 문짝, 혹은 상등을 들고 나와 시체 주위에 둘러쌓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불을 질러 카이사르의 시체를 화장해 주었다.


p.374

카이사르는 평생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권력을 얻었지만 허울 좋은 껍데기였고, 시샘받는 영예였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그를 지켜주었던 위대한 수호신은 그가 죽은 뒤에도 떠나지 않고, 모든 땅과 바다를 뒤져 암살자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 처벌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7일 동안 하늘에는 커다란 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태양빛이 희미해지더니, 1년 내내 빛을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햇빛은 뜨겁지도 않았고, 하늘은 늘 어둡고 음침했으며, 기온이 떨어지자 열매들도 조금 익다가 곧 시들어 떨어지고 말았다.




@소 카토


p.411

카토는 스승의 말을 무엇이든지 따랐다. 다만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이유를 묻고, 그 일을 해야 하는 까닭을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겼다고 한다.


p.417

진정한 용기란 지휘관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존경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며,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사랑이 없다면 다만 그 사람을 존중할 뿐이지 본받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p.467

카토는 칼을 뽑아 보고 칼끝이 상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이제야 내 목숨을 내가 쥐게 되었구나."




@아기스


p.477

스파르타는 보통 여자들이 남자를 지배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기스의 계획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스파르타 재산의 대부분이 여자들의 손에 있었으며, 사치를 좋아했던 여자들은 재산이나 돈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힘을 잃기 싫어했던 것이다.


p.477

아기스는 리산드로스를 통해 다음과 같은 법안을 제출했다. "첫째,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한다. 둘째, 모든 토지를 분배하되 펠레네 수로와 타이게토스 산 사이, 말레아와 셀라시아 사이의 땅을 4천5백 구획으로, 그 밖의 땅을 1만 5천 구획으로 나눈다. 셋째, 후자는 군무를 할 수 있는 지방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전자는 순수한 혈통의 스파르타인들과 외국인으로서 적당한 교육을 받았거나 그 밖의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넷째, 그들 모두를 15개의 반으로 나누되, 각 반은 2백 혹은 4백 명으로 편성해 공동훈련과 공동식사를 하게 한다."




@클레오메네스


p.493

스파르타 사람들은 공포뿐만 아니라 웃음과 죽음, 그리고 열정 같은 것을 모시는 장소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공포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법과 질서는 공포로써 유지된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두려움이 없는 것을 용기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치와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면 법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전쟁에서 가장 용감하며, 타당한 비난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위험을 가장 적게 두려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있어야 존경이 있다."라고 호메로스는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두려움을 자아내는 사람을 존경하게 마련이다.


p.516

판테우스의 부인은 마음이 굳센 여자였다. 그녀는 크라테시클레아의 옷을 하나하나 여며 주었고, 다른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죽을 차비를 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옷을 고쳐 입고, 사형집행인 외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자신의 시체를 바로잡아 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다음 조용한 태도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나타냈으며, 일생 도안 지켜온 지조를 마지막 순간까지 상하지 않게 했다. 그녀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졌어도 스파르타의 지조가 운명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다.




@데모스테네스


p.562

학교에 가더라도 친구들은 언제나 그를 '바탈루스'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허약한 체격을 놀려댔다. 바탈루스라는 말은 원래 어떤 힘없는 피리꾼의 이름이었는데, 데모스테네스가 살았던 당시의 희극작가인 안티파네스는 그를 조롱하는 희극을 쓰기도 했다. 또 다른 학설에 따르면 바탈루스는 추잡한 노래를 지은 시인의 이름이었다고도 한다.


p.564

그가 처음으로 연설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 따위 연설은 집어치우라며 심한 말을 보냈다. 연설이 싱겁고 지루한 데다가 내용 또한 논리가 제대로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았고, 숨이 차서 말을 자주 멈췄기에 말의 앞뒤가 연결되지 않았다. 




@데메트리오스


p.637

예술은 좋은 것은 선택하여 가꾸지만 좋지 않은 것은 거부한다. 따라서 예술이 맡은 본래의 임무는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것을 거부하기 위한 연구와 관찰에 있는 것이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질병에 대해 미리 연구해야 하고, 음악가는 화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불협화음을 연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완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제와 정의, 지혜 등을 판단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좋은 것뿐만 아니라 잘못되고 그른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야 한다. 즉, 그것이 얼마나 명예롭고 공정하고 이로운가를 판단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며 무엇이 그릇되고 해로운 일인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한 번도 악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이 못 되며, 그 단순한 결백성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잉?)


p.674

"스파르타가 단 한 명을 사절로 보냈다는 게 사실이냐?"

그 사절은 스파르타식으로 짧고 현명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대왕 한 분께 사절 한 사람이 왔습니다."




@안토니우스


p.706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뛰어난 외모를 지니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으며, 몸매나 말씨, 성격이나 몸동작 등이 매혹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여러 줄의 현을 매단 악기처럼 여러 나라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나라의 사신이 오더라도 통역하는 사람 없이 상대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를 알게 된 안토니우스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p.750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을 결심을 포기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속은 것은 카이사르였다.


p.751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의 옷을 입고 금으로 만든 침대 위에 쓰러져있었다. 두 명의 시녀들 중 이라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발 밑에 숨이 끊어진 채 죽어 있었고, 카르미온은 안간힘을 다해 클레오파트라의 왕관을 바로잡아 주고 있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39세로, 여왕으로 오른 지 22년, 안토니우스와 함께 통치를 한 지는 14년이 되는 해였다.






이렇게 해서 두텁디 두터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모두 읽어보았네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에요. 소년만화에 나올법한 영웅도 있었고, 탐욕스러운(?) 영웅도 있었고, 제각각 매력을 갖고 있더군요. 저는 카이사르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또 5월에 다른 고전 책으로 찾아올게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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