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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학수 Sep 20. 2022

영화 걸어도 걸어도

무(無) 속에서 존재가 출현하다.

“걸어도 걸어도”(Still Walking)는 코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1962- ) 감독의 2008년 일본 영화입니다.이 작품은 한 가족의 24시간을 묘사한 초상화입니다. 요코야마 가족(The Yokoyama family)은 12년 전 사고로 익사한 장남 준페이(Junpaei)의 기일(忌日)에 매년 모입니다.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 쿄헤이(Kyohei Yokoyama)와 어머니 토시코(Toshiko)는 차남 료타(Ryota)와 딸 지나미(Chinami)의 가족을 맞이합니다. 차남 료타는 남편과 사별한 과부 유카리(Yukari)와 최근 결혼했습니다. 유카리에게는 전남편 사이에서 얻는 어린 아들 아츠시(Atsushi)가 있습니다. 아버지 쿄헤이와 어머니 토시코는 료타가 아이 딸린 과부 유카리와 결혼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존재와 무(無)를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반대는 비존재 즉 무이며, 무의 반대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와 무는 밀접하게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존재 속에서 무(無)가 드러나며,  무(無) 속에서 존재는 출현합니다.     

 

사르트르는 존재 속에서 무가 드러난다는 점을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잘 설명합니다. 나는 친구 피에르를 만나러 커피숍에 갔습니다. 그러나 15분 늦게 도착하여 피에르는 거기 없습니다. 이리저리 둘러 봐도 피에르는 비존재합니다. 피에르가 없다는 점, 즉 피에르의 무(無)는 그 장소에 그렇게 출현합니다. 내가 피에르가 존재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피에르의 비존재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무(無) 속에서 존재가 출현한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 쿄헤이와 어머니 토시코는 죽은 아들 준페이를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만약 준페이가 살아있다면, 부모는 준페이를 그렇게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준페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부모에게 강렬하게 출현하는 것입니다.     


무(無) 속에서 존재가 출현하는 것을 어린아이 아츠이도 경험합니다. 유카리의 아들 아츠이는 아버지가 죽은 지 3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아버지는 지금 없지만  죽은 토끼 이야기를 들으면 아츠이는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죽은 토끼는 아츠이에게 아버지의 분신입니다. 죽은 토끼에게 편지를 쓰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츠이는 웃음이 나옵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도 읽을 사람이 없다는 점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족들은 서로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서로 귀찮아하며, 존재하는 않은 것처럼  존재할 때가 많습니다. 차남 료타는 직장을 잃고 현재 실직 상태입니다. 그런 사정을 료타는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료타의 실직 이야기를 들으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날 것입니다. 료타는 그 점을 우려하며 아내  유카리를 보고 아버지에게 실직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집의 장남 준페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삿날, 가족 앞에서 준페이는 완연(完然)하게 등장합니다. 어머니 토시코는 손에 준페이의 사진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진은 준페이의 분신입니다. 준페이는 지금 없습니다. 그래서 준페이의 존재는 더욱 생생하게 출현하는 것입니다. 

    

쿄헤이는 며느리 유카리가 데리고 온 어린 아들 아츠시에게 의사가 되라고 충고합니다. 아츠시는 쿄헤이의 실제 손자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의사가 되라고 합니다. 원래 쿄헤이는 장남 준페이가 의사가 되어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장남 준페이는 일찍 죽어버려서, 차남 료타를 의사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차남 료타가 의사가 된다면 코헤이는 장남 준페이의 존재를 료타에게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료타는 아버지의 소망을 거부하고 미술품 복원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쿄헤이는 차남 료타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코헤이는 장남 준페이의 존재가 출현하기를 그가 죽은지 12년이 지나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유카리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 아츠시를 의사로 만들어서, 아츠시 속에서라도 준페인의 존재를 보고 싶어 합니다.  

    

지나미는 가족과 함께 그들의 집으로 떠나 버립니다. 남은 가족들만 저녁을 먹습니다. 유카리는 쿄헤이와 토시코에게 애창곡이 뭔지 질문합니다. 토시코는  “Blue Light Yokohama”라고 대답합니다.  이 노래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토시코는 남편 쿄헤이가 다른 여자의 집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차마 그 집에 토시코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노래의 앨범을 사서 남 몰래 듣습니다.   


왜 토시코는 Blue Light Yokohama를 그렇게 자주 불렀을까요? 이미 토시코와 쿄헤이 사이에 사랑은 없습니다. Blue Light Yokohama는 사랑의 비존재를 상징합니다. 남편 쿄헤이가 정부(情婦)의 집에서 그 노래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편 쿄헤이가 정부(情婦)를 사랑하며 불렀기 때문에 그 노래는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토시코가 Blue Light Yokohama를 부를 때, 사랑의 비존재와 존재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밤에 나비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와 준페이의 사진 위에 앉습니다. 토시코는 그것이 준페이의 분신이라고 믿습니다. 나비는 준페이의 존재의 상징입니다. 나비 속에서 어머니 토시코는 장남 존페이의 존재를 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나비는 존페이의 무를 상징합니다. 토시코에게 나비는 준페이 자체가 아니라 준페이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토시코는 그 나비 속에서 장남 준페이의 무와 존재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비는 준페이의 분신이면서, 나비는 준페이의 무(無) 즉 비존재가 출현하게 합니다. 

     

아츠시는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듯 말 듯하여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유카리(Yukari)는 죽었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들에게 알려 줍니다. 아츠시는 아버지가 죽었지만 살아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비존재는 존재인 것입니다.   

   

존재는 무이고, 무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존재의 기대 속에서 무가 출현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반면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무 속에서 존재가 등장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영화 “걸어도 걸어도” 가족 간의 사랑과 갈등을 드러내는 가족 영화라는 점이 토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그런 점 외에 존재와 무의 내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철학 영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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