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심층 심리학
[영화로 보는 인간의 마음]
“아니 왜 그런 남자랑 결혼했습니까?”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2002)에서 형사 장해준(박해준)이 살인 피의자 송서래(탕웨이)에게 질문한다. 무대는 경기도 이포이다. 증권 애널리스트인 서래의 남편이 피살되었고, 경찰은 아내를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다. 일년 전 부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때 서래는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서래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밀입국한 중국인이고, 남편은 출입국 관리소에 근무하며 비자 업무를 담당한 공무원 출신이다. 이 남자가 등반 도중 추락사하자 당시 부산의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해준이 서래를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했다. 사건은 남편의 자살로 결말이 났지만, 실제 범인은 아내 서래였다. 해준은 진범이 누구인줄 알고도 사건을 묻어 버렸다. 사건이 종결된 후 해준은 아내가 거주하던 이포로 근무지를 옮겼고, 서래는 새로운 남자와 결혼하고 이포로 이주하였다. 이 남자도 살해되자 서래는 다시 경찰서에 출두하여 해진에게 수사를 받게 되었다.
왜 해진은 부산에서 서래의 범행을 은폐해 주었는가? 그리고 왜 서래는 해진을 잊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는가? 해진과 서래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불륜이다. 왜 해진은 아내가 있으면서도 외간 여자를 사랑하고, 서래는 유부남인줄 알면서도 해진을 사랑하는가?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토론한다.
사랑의 잠정적 의미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과 좋아함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토론하려면 먼저 그것을 잠정적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용어를 쓰더라도 이 편과 저편이 다른 의미로 사용할 위험이 있다. 앞으로 논의의 과정을 거치며 사랑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은 대상에 대한 관심이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관심을 둔다는 의미이다. 사랑은 반환 가능성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산악인은 산을 사랑하는데, 산은 그 사랑을 등산가에게 돌려 줄 수 없다. 이런 사랑은 ‘좋아함“(to like)이다. 반면 이도령이 춘향을 사랑할 때, 춘향은 그 사랑을 이도령에게 갚아 줄 수 있다. 어떤 사랑은 반환 가능하고, 어떤 사랑은 반환 불가능하다. 사랑의 대상이 사물인 경우, 그런 사랑은 반환 불가능한 부류이다. 산, 난초, 음악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사랑할 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반환 가능한 부류인데, 우리가 토론하는 사랑은 이런 종류의 반환 가능한 사랑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과 좋아함을 강도, 지속성, 그리고 노력을 기준으로 구별한다. 이런 관점은 얄팍하다. 첫째, 사랑은 애착의 정도가 강하고, 좋아함은 약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산악인은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고, 어떤 음악 애호가는 음악을 가족보다 더욱 더 좋아한다. 둘째, 애착이 일시적이면 좋아함이고, 지속적이면 사랑이라고 구별해도 안 된다. 바람둥이의 사랑은 한 순간이며, 평생 동안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셋째, 노력을 기울이면 사랑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좋아함이라고도 구별할 수 없다.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을 수집하고 보호하는데 돈을 들이며, 연인을 위해 별다른 노력이나 희생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사랑의 유발 요인: 객관의 매력과 주관의 공허
사랑을 일으키는 요인은 객체와 주체에게 각각 놓여있다. 첫째 객체의 성질이 사랑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해진이 서래를 사랑하는 이유는 서래가 단순히 젊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정도의 속성만 서래에게 있었다면, 해진은 경찰관의 윤리의식을 저버리고 살인자의 죄를 은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래의 커다란 두 눈에는 아주 나쁜 소식을 듣게 될 사람의 불안과 무엇에도 얽매일 것 같지 않는 낙관이 공존한다. 불안과 낙관은 모순인데, 이것 때문에 해진에게 서래는 매우 신비스럽게 보인다. 신비성은 사랑을 일으키는 강력한 성질이다.
객체의 속성을 사랑의 유발요인이라고 보는 관점은 사랑의 소멸 과정도 설명할 수 있다. 해진에게 중학생 딸이 있으니, 아내에게는 청춘의 매력이 사라졌다. 젊음이 사랑의 유발 요인이었다면, 그것이 소멸하면 사랑도 식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에 해준이 아내와 성관계를 나눌 때 텔레비전을 보며 딴 생각을 한다. 이 장면은 해준이 더 이상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사랑을 유발하는 또 다른 요인은 주체의 공허이다. 우리는 아무나 사랑하지 않고, 나에게 없는 것이 상대에 있을 때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결여된 것이 없다면,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내향적 성격을 가진 남자가 외향적 성격의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보자. 남자는 자신에게 외향성이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 빈 곳을 채우려고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남자가 외향적 성격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어렵다. 다른 하나는 외향적 여자를 유혹하여 그녀가 남자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남자는 여자를 통제할 수 있다. 남자는 자신에게는 외향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외향성의 여자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결여를 극복했다고 느낀다.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청춘을 되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도 길은 있다. 서래와 첫 번째 남편 기대수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처음에 시체 안치실로 들어온 서래를 형사는 기대수의 딸이라고 착각했다. 왜 기대수는 그렇게 어린 여자와 결혼했는가? 60대에 접어든 기대수는 자신에게 젊음이 결여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젊은 여자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공허를 채우려고 했다. 이런 목적으로 기대수는 서래와 결혼하였으나, 서래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기대수의 시도는 실패했다.
사랑, 증강 의지의 발현
왜 인간은 사랑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공허를 채우려고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힘을 길러서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자하는 증강 의지(Will to Power)이다. 사랑이란 잠정적 정의처럼 단순히 좋아함의 감정이나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결여를 채워 자신을 완성하고 확장하는 자기-극복의 과정이며, 증강 의지의 발현인 것이다.
니체의 사랑에 대한 관점은 새롭다. 기독교 전통은 사랑을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라고 본다. 니체는 이런 사랑은 나약한 사랑의 형태라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에 빠져 자신의 잠재력을 향상시킬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반대로 니체는 사랑을 지배와 통제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통제된다. 거꾸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당한다. 해준이 서래가 진범임을 알면서도 속고 넘어간 것은 해준이 서래를 사랑하여 그녀에게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서래는 해진이 자신을 사랑하는 줄 확신하고 있다. 이포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서래는 이렇게 말한다. “날 떠난 다음 당신은 내내 편하게 한숨도 못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서래는 해진을 제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안심하고 범행을 털어 놓고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진은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치고 자신의 자부심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허탈해 한다. 그러면서도 서래에게 범행의 증거가 담겨있는 휴대 전화를 바다 깊숙이 던져 버리라고 조언한다. 해진은 자발적으로 서래의 조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는 두 형태가 존재한다. 능동적 형태와 수동적 형태. 처음에는 해진이 서래를 사랑하지만, 서래는 해진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서래는 해진을 통제하므로, 서래는 능동적 사랑을 하고, 해진은 통제받고 있으므로 수동적 사랑을 한다. 나중에는 일방적 사랑이 상호적 사랑으로 바뀐다. 이포에서는 서래도 해진을 사랑하여 두 사랑은 서로를 통제하며, 서로에게 통제된다. 상호적 사랑이란 통제가 양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진정한 모습을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곤 잘 보여주었다. 부산에서 서래는 범행의 증거가 담긴 휴대 전화기를 바다에 버리지 않았다. 이포에서 그것을 해진에게 주며 사건을 재조사하여 추락한 경찰관의 명예를 회복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서래는 만조 시기에 맞추어 바닷가에 웅덩이를 파고 바닷물이 밀려들어올 때 익사한다. 전개가 이상하다. 갑자기 서래의 사랑이 희생적 사랑이라는 수동적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영화 전체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서래의 해진에 대한 사랑은 영화 후반에 가서도 능동적이며 수동적 형태이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수동적 형태는 아니다. 작가나 감독이 사랑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이런 오류를 범했을 수도 있지만, 이른바 영화적 결말을 위해 알면서도 부정합적 전개를 택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탐험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예술부산. 2024.12. Vol.234.6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