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
1943년 아그네스 데밀은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안무자로 고용되었다. 작품은 단숨에 인기를 끌어 2212회의 기록적 공연을 이어 갔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자신이 영혼을 온통 부어 넣었던 작품들이 비평가와 대중으로부터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있었다는 점에 낙담하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초연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데밀은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과 음식점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다.
“난 탁월해지고 싶은 열망은 불타오르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솔직히 없어.” 이렇게 데밀이 고백하자 그레이엄은 곧장 응답했다. “너를 무엇이 행동하게 재촉할까? 그건 생명의 에너지야. 그걸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해. 넌 자신을 믿을 필요가 없어. 너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충동을 인지하고 그것을 가로막지 말고 움직이도록 길을 열어 둬.” 데밀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은 작품에서 기량의 부족이나 엉성한 연결이 보여 즐겁지 않고 불만스럽기만 하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그레이엄은 “예술가는 만족하지 않아”라고 서두를 꺼내며 격정적으로 외쳤다.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지. 우리를 계속 행진하게 하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살아 있게 만드는 건 바로 기이하고 신성한 불만, 축복받은 동요뿐이야.”
마사 그레이엄의 불만에 대한 찬사는 최근 뮤지컬 ‘시카고’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읽을 수 있다. ‘시카고’는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 25주년을 기념해 작년 10월부터 미국 51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하였고, 그 투어를 마치자마자 공연 팀은 5월 한국에 왔다. 사실 ‘시카고’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1975년이다. 이 오리지널 작품은 밥 포시가 안무하고 연출하였는데,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약 20년 후 1996년 ‘시카고’는 재탄생하였고, 이것은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리바이벌의 연출은 월터 바비, 안무는 앤 레인킹이다.
불만이 인생의 원동력이라는 마사 그레이엄의 글을 인용한 사람은 바로 이 안무자이다. 오리지널 ‘시카고’에서 여자 주인공 록시 하트 역은 원래 밥 포시의 아내인 그웬 버돈이 맡았는데, 나중에 앤 레인킹으로 교체되었다. 레인킹은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때 나는 마사 그레이엄이 아그네스 데밀에게 말했던, 현명하고 놀라운 글귀를 읽었다. 이때 얻은 깨달음이 내 영혼 깊숙이 자리 잡아 나를 성숙하게 했다.”
불만·고뇌 등 부정적 감정도 생명의 에너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품을 줄 알아야
운명에 대한 긍정의 태도야말로 생의 비밀
불만의 가치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대표적 인물이 ‘시카고’의 록시 하트이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록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야심 찬 코러스 걸로 묘사된다. 그녀는 명성과 인기를 열망하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록시는 이렇게 노래 부른다. ‘나는 유명인이 될 거예요. 모두가 아는 그런 사람 말이죠. 사람들은 내 눈, 머리카락, 치아, 가슴, 코를 알아볼 것입니다. 멍청한 수리공의 아내로부터 벗어나 나는 록시가 될 거예요.’
‘시카고’의 핵심은 명성의 추구이다. 많은 사람은 명성을 뜬구름이라고 하찮게 치부한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은 인생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록시의 남편 아모스는 작품 전반에 걸쳐 아내가 그를 형편없이 대할 때에도 아내를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배우자로 묘사된다. 아모스가 출연한 장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가 부른 노래 ‘미스터 셀로판’이다. ‘사람들은 나랑 나란히 걸으면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 내 이름은 미스터 셀로판이 맞아.’ 이 노래는 아내 록시를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가 무시당하고 과소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에 대한 가슴 아프고 우울한 반성을 담고 있다. ‘미스터 셀로판’이라는 제목은 아모스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기에 마치 사람들에게 투명판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모두 명성을 갈망한다. 록시의 남편 아모스처럼 인기 없이 셀로판처럼 사는 인생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불만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상이하다. 아모스 같은 사람들은 불만이 자신을 부식시킬까 두려워 불만의 길을 차단하여 그것이 에너지로 흐르지 못하게 한다. 반면 록시 같은 부류는 불만을 도전과 변화의 도구로 활용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라틴어 구절이다. 아모르는 사랑이며 파티는 운명을 의미하는 파툼(fatum)의 2격형이어서, 아모르 파티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에게 아모르 파티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서술한다. 불만의 고통, 인기의 열망, 질투의 감정을 포함한 모든 일을 좋은 것으로 활용한다면,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록시 하트는 명성을 열망한다. 이것은 그녀에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록시는 운명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한다.[부산일보. 2023-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