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작품을 보는 내내 에밀레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이우환의 작품을 전시하는 별채가 있는데, 2층 건물과 야외 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소리는 작가 자신이 녹음해 온 것이라고 한다. 이우환은 미대가 아닌 철학과 출신이라서 필자는 오래전부터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을 제대로 볼 기회는 10월 중순의 오늘이 처음이다. 짐작대로, 이우환의 작품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근대 형이상학의 주객 이원론을 비판하는 현상학적 사유의 전개였다.
현상학이란 현상 또는 사물 자체를 바라보자는 철학 운동인데, 20세기 독일 철학자 후설이 창시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입장은 너무나 당연하여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린다. 그런데 서양 근대 사상의 관점에서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 자체가 아니라 주관에 의해 규정되는 피동적 존재이다. 18세기 칸트는 인식이 대상을 따르지 말고 대상이 인식을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태도를 제안했다. 이런 혁명적 태도를 그는 ‘코페르니쿠스식 전회’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근대란 원래 새로운 시대라는 의미인데, 그 새로움이란 코페르니쿠스식 전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객관에 대한 주관 우위의 근대적 관점은 객관을 왜곡하고, 그런 객관을 상대하는 주관도 왜곡한다는 반성이 19세기 말부터 제기되었다. “사물 자체로 돌아가자”는 현상학적 자세는 근대의 주관 중심 관점을 비판하고 주관과 객관의 공존 관계를 모색한다.
이런 철학적 배경을 모르면 이우환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관계항’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들은 철판 위에 커다란 돌이 놓여 있거나, 유리판 위에 돌을 떨어뜨려 균열이 나게 하고 그 위에 돌이 배치되어 있다. 돌은 가공하지 않는 자연물이고, 유리판과 철판은 인공물이기는 하나 아직 특정의 물건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태의 재료이다. 이런 것들은 주관이 객관을 규정하지 않은 상태, 객관에 대한 주관의 비개입을 상징하며 돌과 철판, 돌과 유리판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가리킨다. 돌 위에 철판이 그냥 놓여 있다면 그 둘은 서로 침해하거나 간섭하지는 않지만,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독일 보쿰 M 갤러리의 영상을 보니, 이우환은 유리판을 전시장 바닥에 깔고 큰 돌을 떨어뜨려 균열을 일부러 내었다. 이 작업은 돌과 유리가 관계한다는 것, 즉 주관과 객관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는다는 점을 확실하게 한다. 돌이 철판 위에 그냥 있을 때와는 달리, 돌은 유리에 금을 가게 하여 유리에 변형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리를 박살 내거나 유리를 술병으로 만드는 것처럼, 돌이 심하게 유리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돌과 유리의 균열 관계는 주관이 객관에 개입은 하되, 그 정도가 최소한이라는 점을 시각 예술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한다면, 주관과 객관은 둘로 나뉘어 대립하지 않고 평화 공존적 관계를 형성한다. 작품 ‘대화-발굴’도 상호 공존적 주객 관계를 표출한다.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사각형으로 땅을 파고 중앙에 조그만 분홍색 사각형을 그려 넣었다. 땅은 객관이며 분홍색 사각형은 주관의 개입을 상징한다. 분명 주관은 객관의 형태를 어느 정도 바꾸고 있지만 그 개입의 정도는 매우 적으며, 객관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을 작가는 보여 주려고 한다.
이런 식의 조각은 종래의 예술 작품이 아니다. 보통 작품은 감상자에게 대상, 즉 오브젝트여서 작품은 이해 또는 평가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우환의 작품은 이것 자체가 오브젝트가 아니라 어떤 다른 것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우환은 돌과 철판의 관계 자체를 관객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 주관과 객관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근대적 사고 넘어서는 철학적 미술
주관-객관 조화·공존 가능성 모색 주목
지구촌 흔드는 대립적 분쟁에 경종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은 단순히 오브젝트가 아니라 세계를 드러내는 사건(Ereignis)이다. 2015년 12월 연세대 강연에서 이우환은 2014년 프랑스 전시회를 소개한다. 베르사유 궁전 앞 정원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무엇을 설치해도 조형물이 돋보이기 힘들 정도였다. 작가는 고심 끝에 정원에 무지개 모양의 강철 아치를 설치하고, 밑에 카펫처럼 강철판을 깔았다. 사람들은 아치를 지나 강철판 위를 걸어가며 아치가 아니라 하늘과 주변 환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우환은 관객에게 작품 자체를 보여 주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열어 준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 중이다. 주관과 객관을 이원적 대립적 관계로 파악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자아와 타자의 분쟁을 부채질한다. 이우환의 작품이 열어 주는 탈근대의 시각이 에밀레종 소리처럼 멀리 퍼져 간다면, 양편의 조화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부산일보. 20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