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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비 Jul 04. 2023

월간 참스 이야기 2309

영화 수라 : 포기할 수 없는, 누군가는 해야 할

 

영화 <수라>를 보게 되었다.

   1차로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본 것은 페이스북에서였다. 포스팅을 하신 선생님께서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으시기도 하고 성정이 고우신 분이라 '어 볼까?' 하던 차에 2차로 심리독서 모임 <로봇프로이트> 카페에서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어 볼까'에서 '자! 예매!'로

   다행히 한 달여 심혈을 기울였던 연주도 끝이 난 때라 부담감 없이 예매를 했다. 상영관이 적어서 걱정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서 정말 마산이나 창원 가서 봐야 하나 하고 내심 고민했지만 다행히 가까운 롯데시네마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관에 들어간 나는 영화관을 대관한 vvip의 기분을 물씬 느꼈다. 영화가 시작하기 1분 여정도 전까지. 나 혼자서 보게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4세가량의 아이와 엄마가 들어와서 함께 보게 되었다. (서로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봤었다. 나도 울고 아이도 찡찡-서로 다른 의미에 서겠지만 )



#류기화언니

   기화언니는 감독이 어민들을 찍다가 알게 된 지역민이다. 씩씩한 모습에 씩씩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냥 열심히 사는 우리 옆의 사람. 자식들 키우기 위해 갯벌을 열심히 오가며 생을 이어갔던 언니. 언니에게 갯벌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교육비였고 오늘 하루를 책임지는 생활비였다. 조건 없이 내어주는 갯벌은 엄마와도 같았겠지. 그런 갯벌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니. 그건 엄마를 빼앗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기화언니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택했고 어느 날 엄마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거짓말

   갯벌에는 가치 있는 생명이 없다. 지켜야 할 기념물도 없다. 그들의 거짓말에 법원은 탁자에서 땅땅땅. 누구를 위한 거짓말이고 무엇을 얻기 위한 거짓말이었을까. 게다가 가치 있는 생명이란 건 도대체 누가 정한 거지? 고작 인간이. 우주에서 보았을 때 전지적 신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 인간의 생명과 흰발농게의 생명의 가치가 과연 다를까? 더 묵직하다고 말할 수 있나? 거짓말 그만해라.



#동필씨_승준이

   동필 씨는 수라를 지키기 위해 기록을 했다. 본업은 따로 있지만 꾸준히 나와 사진을 찍는다. 한 달, 두 달. 바닷물이 돌아와 그의 기록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의 기록은 10년, 20년을 넘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들 승준 씨는 대학에서 생명을 공부한다고 한다. 아들이 보기에도 '고집 센' 동필 씨, 부인이 보기에는 '갑갑한'동필 씨. 하지만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존경한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며 묵묵히 해내는 그 모습. 그리고 그 책임감과 사명감은 대를 잇고 있다. 그 부자의 모습은 과연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책임감을 가지고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무엇인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포기할_수_없는_일

   영화를 보며 울음을 터뜨린 대여섯 장면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여기였다. 수경스님과 문규현 스님의 삼보일배. 신부님이 결국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도 울고 말았다. 이렇게 고통스러움에도 포기할 수 없음은 과연 무엇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그것은 본인의 명예도 부귀도 영화도 아니었다. '숭고'란 그런 것이겠지. 포기할 수 없기에 결국은 성공하여야 하는 일인데. 제발. 그럴 수 있기를. 어느새 영화에 푹 빠져 그들을 어떻게 응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왜 그토록 몰랐을까 와 함께.



#포기하지_않는_기다림

   바닷물이 말라버린 염습지에서, 이제 생명은 어디에도 없다고 다들 포기하는 때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바닷물을 기다리는 생명들을 발견한다. 그들에게서 삶이란 어때야 하는가를 배운다. 삶이란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흰발농게를 발견한 오동필 씨의 기쁨이 어땠을까. 포기할 수 없는 일이 결국 성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의 조각.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 다시 한번.



#수라는_누구의_땅일까?

   전 세계 3-4위의 갯벌이던 새만금 갯벌이 '도전하는 전북, 혁신과 열정으로'라는 캣치프레이즈로 이루고 싶던 결과는 수십 년 동안 개발 중인 갯벌에서 게와, 새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었을까? 도대체가 이 개발로 이득을 본 지역민이 단 한 명도 없다는데 도대체 이득은 누가 보고 있길래 주인이 누구인지 이름 쓰여있는 것도 아닌 이 땅을 파헤쳤을까? 결국 돈이겠지. 하루하루 나도 돈 없으면 못살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들을 욕심내며 움켜쥐고 싶은 건 무엇일까? 수라는 수많은 기화 씨와 흰발농게, 검은 머리 쑥새의 땅이어야 한다.



#검은머리쑥새

    쑥새의 지저귐을 듣는 순간. 또 터져버린 눈물. 이 영화 다큔가 드라만가. 삶은 연극보다 더한 드라마인 것을 확인시키는 소리. 희망의 소리겠지만 역시나 쉽지 않겠지. 늘 그랬다. 힘센 놈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면 없는 놈들 헛소리가 되더라고. 검은머리쑥새의 지저귐을 잃고 싶지 않아 영화를 보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내 자리에서 새만금을 지킬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기로 한다. 물론 행동도!

  


#월간참스2309

  나는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음악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수라를 돕고 싶었다. 물론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진심을 담아 쓴 이 글과 음악의 파장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조금의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해본다. 수라가 부디 생명으로 가득 차길 바라며.

  음악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첫 부분은 갯벌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중반에 등장하는 위기와 파괴. 그럼에도 살아있는 생명.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알 수 있는 그 스토리 그대로의 전개를 담으려고 했다. 피아노가 리드하는 이 곡은 갯벌의 작은 생명을 아르페지오로 표현했고 위기의 순간은 복잡한 화성을 둔탁히 쌓아올리며 표현하고자 했다.  타악기로 박동하는 그들의 생명을 더 생생히 기억해 내고자 했고 리코더라는 가장 자연에 가까운 악기로 새소리를 표현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영화에서 새소리가 들릴 때는 다큐임에도 픽션을 넘어서는 감동을 준다. 때문에 높은 음역에서 정확한 음을 내기 힘든 클라이네 리코더를 사용하기가 조심스러웠음에도, 이 악기가 독일어로 Blockflöte새부리 플루트라는 의미를 가진 리코더이기 때문에 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곡가의 바람은 꼭 영화를 보지 않고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갯벌의 생명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래서 비단결과 같이 펼쳐진 수라의 갯벌이 다시금 그 끝없는 생명력을 왕성히 보여주는 때를 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오만한 이들의 파괴가 부디 멈추기를.  참스의 작은 이 음악이 기화씨를 기억하고 동필씨, 승준씨를 응원하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부족한 곡을 항상 아름답게 편곡해주시는 추동현 선생님, 산재한 연주와 반주의 물살속에서도 이 까다로운 곡을 연주해주신 진승민 선생님, 마치 텔레파시가 통한 것 처럼 찰떡같이 포인트를 같이 잡은 이상진 선생님, 그리고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든든히 참스를 지켜봐주시는 박홍준 대표님께도 갯벌의 모래알수만큼의 감사를.






https://www.youtube.com/watch?v=faFuQk9SgCU


<월간참스 2309 앨범 출반되었습니다_유툽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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