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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안 Aug 22. 2022

내게 휴식을 줄 용기

휴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 나홀로 강릉 여행기

2021.09.25 작성 _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지쳐있을 때쯤,

나를 위한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강릉행 기차 위에 몸을 실었다.


나는 여행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는 편이다.

몇몇 장소들에 대해서 마커 표시만 해놓고 그날그날 대충 지도를 보며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곤 한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내가 느끼는 지금의 사회는, 계획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사회다.


주마다 있는 스터디 3개, 주마다 써야 하는 기술 포스팅, 풀어야 하는 문제, 운동, 일, 기술 공부, 영어 공부

원하는 것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싶다면, 계획의 수립과 이행 모두 중요하겠지.


근데 여행은 안 그래도 되지 않나?

계획을 안 짰다고 해서 도태될까 불안해하진 않으니.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계획을 안 세우곤 한다.


발이 닿는 대로 한량처럼 거닐다 보면 그냥 그 순간 자체가 나한테 와닿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한 2년도 더 된 일인데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기 전이었을 때

회사 사람들이 길에서 사진을 막 찍더라


그래서 문득 보니 그건 꽃이었다, 그 꽃들은 도로를 가득 채우며 빛나고 있었다.


출퇴근하며 최소 하루 두세 번씩은 보았던 길인데 그동안은 꽃이 눈에 담기지 않았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피어있었다는 얘기를 듣곤,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가만히 경치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으면 해서 보기만 해도 숨이 트이는 오션뷰 숙소로 예약을 했다.



가만히 해변을 걸어 다녔다.


젊은 남자는 노래를 부르는 3명의 중년 여성들을 카메라에 비추고 있었고 여성들은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카메라에 담긴 본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또 앞에 있는 중년의 남자가 카메라에 담으며 세상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스크 뒤로 미소를 그렸다.

그냥 그 사람들이 즐거워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겠다며 고군분투를 하고, 아이의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해변의 포토존에서는 가족이 사진을 찍기 위해 서 있었고, 사춘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포토존에 서 있는 게 어색한지, 투덜투덜 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있었다.


이 여행을 계획했을 때 나는 바다 경관을 보며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근데 막상 눈앞에 펼쳐진 넓은 하늘과 넓은 바다를 보고 있자니, 눈물부터 났다.


내가 눈물이 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넓은 하늘과 넓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그 순간이, 그 절경이 좋았던 것뿐이었다.


참 푸르렀다.

해변에 있는 바위에 파도가 부딪쳐 거품을 냈고, 그 파도는 해변가로 밀려와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온전히 파도의 물결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바다 위에 한가득 앉아있는 새들에게로 멈췄다.


어떤 새들은 바위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새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새들도 경치를 바라보며 쉬고 있는 걸까?


바위에 앉아있던 새 한 마리가 바닷물로 들어가 잠수를 했다가 다시금 고개를 드는 행동을 반복했다.

누가 봐도 그건 새들만의 수영, 놀이였다.


다른 새 무리를 보았다.

파도가 끝나는 지점에 옹기종기 모여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저러다 파도에 휩쓸려가면 어쩌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몇 초 가지 않았다.

파도에 두 발만 잠길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며 놀이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파도가 드세져 본인을 덮칠 세면 날갯짓을 하며 자리를 이동했다가 다시 파도로 걸어 나갔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모든 소리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저 모든 것들은 그냥 각자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뿐인데 그게 참 잘 어우러졌다.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휴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과거의 나였다면, 이 또한 그냥 특별할 것 없는 세상이라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열심히 산 나를 위해 정말 휴식하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던 감정이었다.


나는 가만히 해변가를 맨발로 걸어 다녔다.

수영은 번거롭기도 하고 발만 담그어도 내가 휴식하기에는 만족스러운 정도였기 때문에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맞추고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나갔다.


어떤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엔 발자국이 깊게 남아있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온 건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고 규칙적이었다.



그러다 센 파도가 밀려오니 발자국의 홈 부분에는 물이 차고, 가장자리 부분은 물과 함께 쓸려내려 갔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니 발자국이 모두 사라졌다.


내 발자국도 저렇게 남았다가 모두 사라진 것일 테다.

또 이 해변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은 몇십 년 전에도 몇 백 년 전에도 있었겠지.


선명했던 발자국이 지워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고난과 시련이 연속되는 것 같고,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도 힘이 부치는 느낌에 당장 뒤를 바라보면 그 발자국이 그렇게 깊고 선명해 보일 수가 없다.


그게 너무 깊어서 채워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하곤 하는데 지나고 보면 어느샌가 발자국이 지워져 있는 경우가 있지 않나. 물론 파도와 발자국과의 거리가 과연 어느 정도냐에 따라 상이할 순 있겠지만


그러다가 햇빛이 적당히 들어 내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던 곳에 신발을 깔고 앉았다.

부모님이 보셨으면 청승이라면서 등짝을 한 대 때리셨을 거다.




분명 이곳에 온 이유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그 순간에 집중을 했다.


과거를 되짚고 성찰을 하고 거창한 인생 계획을 세워보고, 대단한 다짐을 해보는 그런 대단한 시간을 갖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최대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좀 쌀쌀하네, 파도가 잔잔하네, 새가 참 작고 귀엽게 생겼네, 노을이 참 예쁘다.


그렇게 한참 후 숙소로 들어왔다.

그리곤 다시 테라스로 나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해변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다.



강릉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친구에게 '다시 속세에 돌아왔다'라고 표현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강릉에서 느꼈던 걸 누군가는 서울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내가 강릉을 보며 감탄했던 경치가 강릉 주민들에겐 일상일 것이다.


그럼 이게 단지 타지여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경험하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나에게 휴식의 기회를 줄 용기

온전히 휴식에 집중할 용기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라는 숨 막히는 강박.


오늘의 휴식이 하나 둘 모여 미래의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함만을 안고 조급하게 살아왔었다. 어느 순간부터 과정보단 결과에 연연하며 자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강릉행 열차에 몸을 싣기 전에 내 커리어, 미래, 일, 인간관계, 걱정, 고민, 조급함, 불안함을 모두 서울에 놓고 왔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된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현재만을 생각하는 그 순간이 휴식인 것이다.


한 번쯤 본인이 지쳤다고 느껴진다면, 나 자신에게 휴식의 기회를 줄 용기를 가져보았으면 좋겠다.

어렵지만, 꼭 필요한 경험이다.




- 2021.09.25 -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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