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너머의 사람
2025.04.07
몇 달 전, 동료가 듣기 좋게 잔잔하며 또 흥이 나는 가사 없는 노래들을 모아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한 적이 있다.
댓글을 보아하니 계정주가 '한국인'인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우연히 접한 그 플레이리스트는 유난히도 내 취향에 알맞았다.
유튜브 프리미엄을 쓰지 않는, 스포티파이로만 음악을 듣던 내가 그것을 듣기 위해 여러 번거로운 과정을 기꺼이 거치면서까지 적지 않은 기간 그 음악을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여러 감명을 주었다는 뜻이다.
추천받았던 그 플레이리스트가 너무 좋았던 탓에, 나 또한 그대로 다른 동료에게 추천을 했더랬다.
맘에 들어하던 그 동료는 몇 날에 걸쳐 음악을 듣다가 AI가 만든 음악인 것 같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내게 건넸다. 나는 "에? 설마요.. 그럼 안되는데"라는 반응을 하며 믿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노래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내 알고리즘에는 비슷한 류의 플레이리스트들이 줄기차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썩 괜찮은 플레이리스트를 새로이 건진 것 같아 댓글을 보는데 '단순하게 AI로 찍어낸 플레이리스트들이 판을 친다" " AI가 플레이리스트를 접수했다"와 같은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제야 내가 즐겨 듣던 그 플레이리스트가 AI 음악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원작자가 누구든 노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가 즐겨 듣는 노래의 출처가 AI가 아니길 기대했다. 출처를 알았을 땐 크게 실망했다.
원작자가 AI라는 걸 알게 된 뒤 동료에게 볼멘소리로 "AI가 예술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했다.
AI가 노래를 잘 만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AI 중심의 서비스를 다룬 적도 있다. 또 개발자로 일하면서 다른 직군 대비 AI의 영향을 많이 또는 가까이서 보고 듣고 있다. 심지어 나는 AI가 달려 있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개발을 하고, 또 이용하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산업적으로 기술적으로 AI의 활용 가치는 뛰어나다. 당연히 돈이 되는 곳엔 AI가 투입될 것이다. 예술계통에서만은 AI가 사용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이것이 오히려 예술계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바랐으며,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그 AI 음악을 들으며 나는 그 너머의 사람, 작곡가를 떠올렸다. 어딘가 침울한 듯하면서도 경쾌하게 감각적인 리듬은 작곡가의 어떤 심상과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어떤 계기로 이런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걸까 하는 잡다한 생각을 종종 했다. 그래서 그 노래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다독가는 절대 아니지만 나름 책을 즐겨 읽는 편에 속한다. 주로 인문 철학 그리고 에세이나 산문을 좋아하는데, 간접적으로나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식을 경험할 수 있어 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글을 보다 보면 글에서 작가 나름의 고민과 가치관,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강요가 없고 부담스럽지 않으며,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으며 나름의 시야를 확장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책이 아닌 사람을 통해 경험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사람 대 사람으로 글만큼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다.
원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곤해하는 편이기도 하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대화라는 게 본디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순 없는 구조이다 보니 그만큼 나의 이야기도 꺼낼 줄 알아야 한다. 글이 아닌 말로써 나의 개인적인 것들을 전달하는 것을 많이 어려워하는 편이다 보니 더더욱 책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AI가 문학계에도 침투하기 시작해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는 수상작의 5%에 달하는 문장의 출처가 생성형 AI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에서도 어떤 수상작이 알고 보니 AI 작품이었다는, 평가위원 마저 후에 그것을 알고 꽤나 당혹스러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인데 이런 기사를 마주할 때면 늘 AI라는 존재가 얄궂게 느껴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대부분은 공개되지 않은 채 나의 메모장이나 블로그 비밀글로, 카페에서 내주는 갈색 휴지에, 방치되어 있던 노트를 펼쳐 나타난 중간중간 빈 페이지에 글을 쓰곤 했다.
몇 달 전, 커리어 관련 플랫폼에서 유료 구독 모델을 선보이며 '글쓰기' 강의를 홍보하는 것을 보았다. 동료가 내게 이를 공유해 주어 흥미롭게 살펴보는데 커리큘럼 목차 중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AI로 효율적인 글쓰기', 목차를 보기 전까지 약간 들뜬 마음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인사이트와 경험을 나누며 감명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스크롤을 하던 중에 그 목차를 발견하곤 조용히 창을 닫았다.
사실 나라고 모든 글을 혼자 직접 쓰진 않는다. 가끔 보고서나 기술적인 가이드 문서 같은 경우는 AI에게 한 번 맡기고 추후 수정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름의 신념이라면, 그 외 내 이야기를 담은 글에 대해서는 AI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신념이자 자존심이랄까
AI는 인간의 감성을 흉내 낼 순 있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사람이 살아가며 느끼는 고통과 고난, 모순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관계에서 오는 안락함, 사회적 불안을 AI는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은 알고 있을지언정, 나약함에서 오는 인간성과 인간미를 AI는 느끼지 못한다.
문학 작품 데이터를 기반으로 아무리 있어 보이게 포장해 내어 글을 써낸다 한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유가 없는 내용을 쓰는 작가는 독자를 설득할 수 없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 말을 잃은 여주인공의 학창 시절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다.
의사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단체생활의 자극은 그녀의 침묵에 균열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더 밝고 진해진 정적이 어둑한 항아리 같은 몸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붐비는 거리에서, 그녀는 마치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서 움직이듯 무게 없이 걸었다.
물 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어른어른한 고요 속에,
'어둑한 항아리 같은 몸을 채웠다',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서 움직이듯 무게 없이 걸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작가는 내게 그 감정을 온전하게 전달해 냈다. 어찌 이런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대체 어떤 삶을 살아내며 감정을 대했기에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걸까 놀라워서 문장을 읽으며 입이 떡 벌어졌다.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한강 작가는 단어에서 조형을 보고, 분절을 하고 음율을 느낀다. 그 표현의 섬세함에 가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작가는 글을, 또 단어를 매개체로서만 대하지 않고 작은 음율 하나에도 마음을 담아 받아들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독자가 문학을 통해 경외심이나 감명을 받게 되는 건, 그 너머에 같은 종인 '인간 작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AI가 아무리 멋들어진 글과 문장을 써낸다 하더라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정신의학과 박사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직접 써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또 감내하며 버틴 인내의 시간들을, 독자마저 가늠되지 않을 정도의 등장인물의 시련 또 고통에서의 배움을 AI는 이해할 턱이 없다.
AI 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직군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먼 훗날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지금의 나 또한 AI 기류에서 뒤처지지는 않을까, 앞으로 내 업은 어떻게 될지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이따금씩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나는 그 영역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커리어든 인간적으로든 더 높은 단계를 올라가기 위해선 결국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득 느끼고 있다.
사람을 설득하고 이끄는 소프트 스킬, 커뮤니케이션 또한 AI가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또 비즈니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며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이에 윤활제 역할을 하는 것, 프롬프트로 질문을 작성하기 전에 감각으로써 먼저 느끼는 것 이는 결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누구보다 AI를 탐탁지 않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AI를 많이 쓰는 한 사람으로서, 요즘 시대를 살아가다 보면 그냥 이런저런 모순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발전했으면 좋겠고, 작품 그 너머의 사람을 떠올리다가 나중에 실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계속 성장해 내게 더욱 큰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 하며, 모순적인 나를 애써 합리화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