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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Jun 12. 2024

층간소음의 새로운 장(場)을 열다

아들 둘 가진 것이 죄라면 죄입니다만!

우리에게는 15년생, 17년생 아들 둘이 있다.

대한민국 표준을 훨씬 넘는 아빠와 엄마의 키와 덩치 덕분에

두 아들들은 우월한 신체적 유전자를 가졌다.


좁은 땅과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공동주택이 밀집한 한국땅.

자랑스럽게 물려준 아들들의 유전자가 때로는 짐이다.

이사 갈 때마다 아들 둘 가진 것이 죄라면 죄다.


건장한 아들 둘을 낳은 '대역죄인'인 나는 늘 아래층 이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남편의 첫 전임사역지의 사택이었던 아파트


그곳은 조금 오래된 아파트이긴 했지만 에서 우리 네 식구가 살기에는 최적이었다.

놀이방 벽 한 면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 벽지로 꾸며주었고

베란다에는 간이수영장도 설치해 주어 여름이면 신나게 놀았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우리에게도

층간소음으로 인한 걱정과 미안함이

늘 우리 발목을 잡았다.


명절 때마다 아래층에 선물을 갖다 드리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결국 아래층 집 대학생 딸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학교 시험이 있어서요. 조금만 조용히 걸어 주 실 수 있나요?"


'앉아서 그림 그리며 노는 딸'들과는 달리

취침, 식사 시간 외에는

'늘 샤우팅창법을 쓰며 걸음마 이후로는  늘 뛰어다니는 아들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사 가는 곳마다 늘 죄인이었다.



캐나다 밴쿠버로의 유학이 정해진 후

그곳 생활을 위한 러 가지를 검색하던 중

밴쿠버의 모든 집은 최근에 지어진 고층 콘도 외에는 거의 목조주택이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캐나다 층간소음에 의하면 한국 층간소음은 층간소음도 아니라는데..


우리는 1층 집을 찾아야만 했다.

1층집이 아니면 아들 둘을 가진 우리는

밴쿠버에서 살 곳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밴쿠버 입국 3일 전

네이버 카페 '헬로밴'에  올라온 1층집 렌트 광고

오래된 하우스이긴 했지만 1층집이란 것과 집 근처 3분 거리에 coquitlam river가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 함께 '이 집이다!'를 외쳤다.


급하게 남편의 신학대학원 동기목사님께 부탁을 드려 그 집을 한번 다녀와달라고 했다.

목사님은 집이 너무 오래되었고 위층의 층간소음 때문에 많이 힘들 것이라는 솔직한 코멘트를 주셨다.


선택권이 없는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원을 했고

(밴쿠버에서 렌트를 구할 때는 집주인에게 기본 인적사항을 포함한 여러 가지 내용의 서류를 fill out 하여 application을 해야 한다)

 밴쿠버 입국 당일 인천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할렐루야!

밴쿠버의 포트코퀴틀람이란 도시에 위치한

하우스 1층

간절히 바라던 1층집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


집에 오래되었다는 것(45년 이상)과

집주인이 위층에 산다는 두 개의 단점을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렴한 렌트비 1600불!

동네 시세보다 600불 정도 저렴한 렌트비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내내 우리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우리는 격리기간 10일을 끝내고

앞으로 4년간의 밴쿠버 생활의 우리의 홈스윗홈이 되어줄

Patricia ave로 이사했다.


2층에 사는 한국인 가정은 딸 하나를 둔 조용한 가족이었다.

시끄러운 우리 집 아들 둘과 조용한 윗집 딸은 어느새 친구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은 하교 후 위층이든 아래층이든

그날 기분에 따라, 그날 놀고 싶은 장난감에 따라 놀 곳을 정했다.

주인집 딸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나는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서 함께 먹었고

우리 집 아들들이 위층에 올라가는 날이면 집주인 사모님께서는 온갖 맛난 간식을 만들어 주셨다.


근처 공원에서 함께 놀고 동네공원, 집 뒷마당에서 고기파티를 함께 했다.

주인집사모님은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너무 많다 싶으면 우리와 함께 나눴고

내가 병원에서 받아온 선물들이 너무 많을 때도 우리는 함께 나눴다.

남편이 없는 날 아이가 급하게 아픈 적이 있었는데 주인집사장님께서 응급실까지 데려다주셨고

아이 학교 문제로 마음이 힘들었던 주인집사모님은 우리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그 고민을 반으로 나눴다.

심지어 집주인 사장님께서는 한국에 출장을 다녀오시며 우리 아이들의 선물까지 사다 주셨다.


저렴한 렌트비

친절한 집주인 내외분

그리고 성별이 다름에도 신나게 잘 노는 아이들까지 

우리는 여한이 없었다.

 

남편은 늘 나에게 오래된 하우스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종종 했으나 난 개의치 않았다.

평균이상의 덩치를 소유한 우리 아들들이 살 곳은 밴쿠버 땅에서 이곳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린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렇게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우리에게도

사실 단 한 가지 힘든 점이 있었다.

바로 취침시간


우리 가족의 취침시간은 9시

이른 날에는 8시에 잠들기도 한다.


그러나 위층은 12시가 취침시간이었다.

일찍 잠들기에 일찍 일어나는 우리와

늦게 잠들기에 늦게 일어나는 윗집


새벽 4시면  일어나야 했다.

아이들 도시락도 싸야 했고 병원일에 학원수업준비에 할 일도 산적했었지만

나는 전형적인 '새벽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위층 발소리 때문에 9시 잠들어 11시에 깨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잠을 청해보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한번 깨면 다시 못 자는 쓸데없이 예민한 내 수면습관 때문에 

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다.


그렇게 하루에 2시간 3시간 밖에 못 잔 상태가 지속되니

몹쓸 고질병 '이석증'이 재발했다.


17개월 차이 두 아들을 독박육아하며 처음 얻게 된 이석증

귀의 전정기관에서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작은 탄산칼슘

즉 '이석'이 떨어져 나와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질병이다.


이석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신생아와 17개월 아들 둘을 키우며 '부족한 수면'으로 인해 이석증이 찾아왔었다.


7년 전 이석증이 찾아온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다행히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때라 바로 진료를 보고 약 처방을 받았다.


잠 못 자는 것이 뭐 대수인가

신생아를 두 번이나 키워본 나는

2시간 간격의 쪽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대로 잠을 못 자 생긴 '수면빚'은 언제라도 갚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지난 7년 이석증을 자주 겪어본 경험칙으로

앉으나 서나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좀 어지러워서 누워볼까? 하는 생각에

눕는 순간 어지러운 고통이 배가 되어 찾아오는  

이 몹쓸 병에 관해 이미 '전문가'였다.


윗 집에 손님이라도 오시는 날에는 본의 아니게 윗집의 대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것은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나누는 담소조차도 또렷이 다 들린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엿듣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교회 예배반주를 하시는 주인집 사모님께서 연습이라도 하는 날이면 난 1층에서 신나게 따라 부르며 아멘을 외쳤다. 그렇게 1층에서는 찬양으로 2층에서는 반주로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3년 전 내가 양재동의 한 교회를 다닐 때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친한 동생

그 친구가 밴쿠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밴쿠버에 오게 되었다.

주인집에 양해를 구하고 교회 동생이 집을 구하는 동안 우리 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화장실이 하나인 점이 불편할 줄 알았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나 층간소음 문제

"언니, 윗 층 아저씨가 옆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아요. 코 고는 소리가 정말 크게 들려요"


캐나다에는 여러 종류의 거주 형태가 있다.

한국의 아파트 개념인 콘도

우리가 살고 있는 하우스

그리고 타운하우스


우연히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님과 층간소음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도중

듣고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목사님 댁의 거주 형태는 독립된 집을 나누어서 살고 있는 준단독주택형태 (semi-detached house)

2 가구가 하나의 집을 반으로 나누어 독립적인 공간으로 살 수 있는 형태이다.

어느 날 옆집 거주자가 집으로 찾아와 '변기 내림 횟수'를 언급했다고 한다.

변기를 하루에 시간을 정해서 한꺼번에 내릴 수 없겠냐는 요청이었다.  

둘도 아닌 셋도 아닌 다섯 식구의 용변을 통제하려 들다니

세상엔 참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우리 가정의 은밀한 소리까지도 위층에 다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도 잠시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위층식구도 내 식구 위층집 딸도 내 딸이라는 마인드로 살기 시작했다.


윗집 발망치 소리를 들으며

의도치 않게 그들의 하루 스케줄과 동선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고

특히 윗집에서 개를 키우게 된 이후로는 개껌 먹는 스케줄까지 우리는 함께 했다.

하필 개껌을 씹으며 노는 공간 아래가 바로 우리 네 가족이 자는 공간이었기에

우리는 매일밤 개껌 스낵타임이 시작되면 학창 시절 장난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겼다.

학교 쉬는 시간에 손톱으로 칠판을 벅벅 긁으며 친구들을 놀리던 장난

개껌을 먹는 개의 손놀림소리가 칠판 긁는 소리와 흡사했다.

또한 가족들 없이 혼자 있는 개가 분리불안으로 우는 날이면

남편은 마음 담은 개(짖는) 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남편이 흉내 내는 개소리를 듣고 윗집 개는 마음의 평안을 얻곤 하였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잠을 못 자 이석증이 재발했고  

위층의 모든 소음과 함께하였지만

우린 힘들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힘들었지만 이겨내야 했다.

시세보다 싼 렌트비와

어린 두 아들들을 데리고 이 세상 어디로 이사를 간들

층간 소음 유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위층도 아래층발(發) 층간소음 문제로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다.

상상은 했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가끔 병원근무를 집에서 하기도 했는데 조용히 전화로  얘기하는 모든 내용이 또렷이 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잠을 못 자 이석증을 겪었던 것처럼

위층집 사모님도 불면증을 얻어 고생 중이셨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을 싸기 위해 숨죽이며 거실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 찬장을 열어 그릇을 꺼낼 때는 신생아 다루듯 했다.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대부분 까치발을 들었다.  

실수로 바닥에 뭐라도 떨어트리는 날에는 온몸에 식은땀이 나곤 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 중의 하나 '새벽 깨우기'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섬유회사를 운영하시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출근하시곤 했다.

그런 부모님에게 전 날 학교에서 있었던 재밌는 일을 얘기하려면 혹은 용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날이면

부모님이 깨어있는 새벽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평생 새벽을 깨우며 내 못다 한 생각이나 일들을 '마무리'하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이나 일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 행복한 나만의 새벽시간

이렇게나 소중한 내 새벽을 그 누구에게도 뺏기기 싫었지만 그곳에서 만큼은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수십 년 간 이어온 라이프스타일이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참고 사과하고 이해하고 노력하기를 2년!!


어느 날 새벽 6시

엄마를 닮아 새벽형 인간이 되고 싶었던 장남!

큰아이가 설정해 놓은 알람이 울렸다.  

화장실에 있던 나는 알람이 울리는 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안방으로 전력질주 했다.

약 10초간 울리던 알람을 듣고

위층에서 바로 카톡이 왔다.


우리는 그 카톡을 계기로 이사를 결정했다.

  

목회자 가정이 되어 다른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었고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선을 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 뒤 윗집에 이사를 통보하게 되었고

그간 층간소음으로 마음고생, 몸고생을 했던 서로를 위로하며 사과했다.


이사를 결정하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2년 전 밴쿠버에 갓 입국했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1층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우리.

렌트 광고를 헬로밴에서 보자마자 '이 집이야!!' 외치며 간절히도 원했던 우리.

지인 목사님께서 보시고 살 곳이 못된다며 걱정하셨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다짐했던 우리.


지난 2년간 참 감사하게 잘 살았다.

렌트비도 저렴했고

매년 법정 최저의 렌트비상향만을 요청하면서도 미안해하시던 주인집사장님

심지어 주인집에 가족이 방문했을 때도 몇 달간 공과금도 면제해 주셨다.(원래는 우리 집이 3/1을 낸다)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아 말씀드리니 새 보일러로 교체해 주셨고

수도가 고장 나서 말씀드리니 바로 기술자를 불러서 고쳐주셨다.

뒷마당에 대형 트램펄린도 직접 설치해 주셔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았고

여름에는 간이 수영장도 설치주셨다.

애초에 우리를 직접 만나지 않고도 렌트를 허락해 주신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캐나다에 거주한 지 1년 8개월일 지나고 세금신고를 한 가정에 한해서

자녀의 인원수에 맞춰 child benefit이라고 부르는 정부보조금이 나온다.

7세, 9세 두 아들이 있는 우리 집은 한 달에 1100불  입금이 된다.


보통 child benefit이 나오는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차를 바꾸거나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2년 전 child benefit이 나오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설마 우리도 그렇게 될까?

남편과 얘기한 적은 있지만 사실 우리는 4년 동안 그냥 이곳에 살 작정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편은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계속 이사 가자! 설득했었고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는 내가

그냥 4년 동안 여기서 살다가 한국 가자! 를 외쳤었다.


남편은 나에게 자주 미안하다고 말한다.

목회자 남편 만나서 이 고생을 한다며

특히 좁고 오래된 집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어찌나 자주 하는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감사하게도

남들보다 조금은 유복하게 자랐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원 없이 다 해보며 자랐다.  


남편은 다른 집처럼 좋은 집 넓은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 엄청나게 미안한 모양이다.

남편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난 똑같은 에피소드를 얘기해 준다.


우리 엄마 tv 리모컨 찾아주느라 아빠랑 내가 늘 고생했던 이야기

어린 시절 집이 넓어 늘 뭐가 자주 없어지곤 했던 이야기를 말이다.

결국 아버지는 안방 tv리모컨은 안방침대에 거실 tv리모컨은 거실소파에 고무줄로 묶어 놓았다.


아버지 사업이 잘 돼서 넓고 좋은 집에 살 때도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서 고모네 집 단칸방에 살 때도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나

우리 네 가족은 언제나 그랬듯 행복하게 살았다.

특히 서로 웃기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그저 서로를 웃게 만들 수 있음이 행복했다.

늘 정확히 한 박자가 늦는 49년생 아버지의 웃음 역시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행복의 기준은 좋은 집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 각자에게 달린 우리 몫이다.

행복하자 맘먹으면 우린 언제 어디서나 행복할 수 있다.



층으로, 옆으로 명백히 나누어졌음에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두 가정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곳.

엄청나게 비싼 월세를 빠짐없이 다 내고도

비싼 월세만큼의

층간소음 스트레스를 그대로 받으며 살아가는


층간소음의 새로운 장(場)을 연 밴쿠버 목조건축집

  

지난 2년간 참 행복하게 잘 살았다.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참 오래된 우리 집.

비록 목조주택이라는 태생적(胎生的) 한계 때문에

위층집과 우리 집 두 가족 모두를 힘들게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우리 가족을 보필했던

Patricia ave 우리 집 아듀!!


그동안 참 고마웠다.


우리 가족만큼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너에게 찾아와

너의 존재를 환하게 빛나게 해 줄

새로운 가족을 기대해 보렴!


그렇게 우리는 정들었던 Patricia ave를 떠나

밴쿠버에서의 남은 2년 동안

우리 네 가족에게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져다줄

우리만'홈스윗홈'이 될 곳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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