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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의 재배치, 지역이 기다리고 있다

여가와 커리어의 새로운 만남, 지역에서 다시 시작하다

“정년 이후,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할까.”


50대 후반에 접어든 이들에게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현실이 된다. 일터에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나면 갑자기 하루가 길게 느껴지고, 그 긴 하루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해진다. 익숙한 출근길 대신 낯선 공원이 일상의 무대가 되고, 이름표가 사라진 삶에서 나를 설명할 언어가 빈칸으로 남는다. 그 빈칸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바로 여가, 그리고 지역이라는 키워드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때다.


은퇴 이후, 많은 이들이 “이제야 여유를 즐기겠다” 말하면서도 정작 시간을 흘려보낸다. 2020년 보건복지부의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하루 여가시간은 평균 7시간에 달하지만, 이 중 절반 이상이 TV 시청 등 수동적 활동에 쓰이고 있다. 여가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다시 마주하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 기회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많다. 실제로 중장년 대다수는 오랫동안 일과 가족에 몰두해 살아오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 방법을 익힐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여가를 단순히 '노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이제 여가는 내가 가진 전문성과 경험을 일상에서 풀어내는 ‘생활 속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이를 가장 자연스럽게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지역사회다. 다양한 현장에서 퇴직자의 경험과 역량을 기다리는 곳이 많다. 예컨대 일부 지자체에서는 은퇴 교사를 지역 학습 멘토로, 은퇴 공무원을 마을 행정 지원인력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봉사자가 아니라, 지역의 삶을 품질 있게 변화시키는 ‘시민 리더’로 재정의되고 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는 이를 ‘여가 경력’이라고 부른다. 즉, 단절된 경력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되는 삶의 흐름이다. 여가란 더 이상 소극적 소비의 시간이 아닌, 사회적 기여와 자아실현이 맞닿은 제2의 커리어로 발전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변화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와 인식 모두의 전환이 필수다.

첫째, 지역 기반 여가활동 중개 플랫폼이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현재 여가 관련 기관은 경로당과 복지관 등 제한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고, 중장년 세대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각 지자체에 여가활동사와 연계 전문가를 배치하고, 퇴직자와 지역 니즈를 연결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여가는 단순한 선택이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사회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둘째, 여가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여가는 ‘시간을 남는 대로 쓰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삶을 설계하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특히 퇴직 5년 전부터는 여가 역량을 기르는 교육과 훈련이 정규화되어야 하며,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마을학교 강사, 문화기획자, 돌봄 코디네이터 등 여가와 전문성이 만나는 접점을 제도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인생 후반전에는 명함이 사라진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십은 직책이 아니라 관계와 영향력에서 비롯된다.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가진 전문성과 열정을 이웃과 나누는 일, 그것이야말로 여가를 넘어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력의 설계도다. 그리고 그 설계도는 지역사회에서부터 다시 그려질 수 있다.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교육·경영·생애설계 분야 전문가.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강의와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charlykim@hanmail.net


증명사진(김한준)_small.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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