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분노의 유통망

― 현대 사회의 ‘감정 거래’ 구조

“총은 어떻게 퍼졌을까?” 넷플릭스 K-드라마 〈트리거(Trigger, 2025)〉속 형사 이도는(김남길 분) 총기의 출처를 추적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총은 한 사람이 쏘았지만, 그전에 누군가가 그것을 건넸고, 현실에서도 폭력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폭력의 방아쇠를 당기기 전, 누군가 분노를 제조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유통한다.


우리는 매일 ‘분노의 유통망’을 통과하며 살아가는데, 뉴스의 헤드라인과 SNS의 짧은 영상, 온라인 댓글, 정치인의 연설까지 모두 감정의 흐름을 자극한다. 감정은 정보보다 빠르고 사실보다 오래 남으며, 특히 분노는 다른 감정보다 공유 속도가 두 배 이상 빠르다고 한다.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은 ‘집단 극화’와 ‘사이버 극화’ 개념을 통해, 분노 콘텐츠가 같은 의견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고 반대 의견을 차단하면서 결국 사회를 ‘내 편’과 ‘적’으로 분할한다고 설명했다.


〈트리거〉에서 총기 공급자 문백은 분노를 ‘재고’로 삼았다. 억울함·모욕·좌절을 안은 사람들에게 총을 건네면 현실에서도 분노는 ‘상품’이 되며, 언론은 그 감정이 폭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현실에서도 분노는 곧잘 ‘상품’이 되며, 언론은 클릭 수를 위해, 정치 세력은 지지층 결집을 위해, 일부 기업은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분노를 활용한다. 이것이 바로 ‘분노 자본’이다.


이 분노 자본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사실 확인이나 맥락 제공 없이 자극적인 단어와 이미지로 손쉽게 분노를 만들어내는 저비용 대량 생산이다. 둘째, 알고리즘이 확산을 주도하여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분노만 소비하게 되는 고속 유통 구조다. 셋째, 분노가 사라진 뒤에도 불신과 혐오가 잔여물처럼 남아 사회적 관계망을 서서히 허물어뜨리는 소모 후 잔여물이다.

ChatGPT Image 2025년 8월 18일 오전 02_49_18.png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분노를 공급하며, 상대 진영 공격과 위기감 조성, 두려움 확대로 이어진다. 미디어는 ‘분노형 제목’으로 트래픽을 올리고, SNS는 감정적으로 강렬한 게시물을 상단에 노출한다. 이런 구조에서 시민은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가 되어 분노를 리트윗 하고 댓글을 달며 새로운 분노 콘텐츠를 생산해 유통망의 한 축이 된다.


문제는 이 유통망이 폭력의 임계점을 낮춘다는 사실이다. 분노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면 일상적 불만이 사건의 도화선이 되며, 직장 내 부당대우·법원 판결 불신·편향 수사·무책임 행정·스토킹·가정폭력 외면 등이 그 예다. ‘제도는 믿을 수 없다’는 확신이 자리 잡으면 사람들은 방아쇠를 스스로 당길 준비를 하게 된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먼저 분노 유통망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뉴스와 SNS에서 감정적으로 자극적인 콘텐츠에는 출처와 사실 검증 과정을 표시하고, 알고리즘 추천 기준을 공개해야 한다. 정치권은 선거 과정에서 허위·과장 정보에 대한 실시간 팩트체크를 강화하고, 위반 시 즉각 제재를 받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둘째, 분노 완충 장치를 설계해야 한다. 영국은 ‘시민 토론 허브’를 운영해 온라인 갈등을 오프라인 대화로 전환하고, 한국도 지역 커뮤니티센터에 ‘감정 조율관’을 배치해 갈등 당사자 간 대화·중재를 지원할 수 있다. 법적 분쟁 전 단계에서 분노를 해소할 절차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셋째, 분노의 대안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군대·기업 교육에 분노 인식·관리 과정을 포함하고, 위기 가구나 반복 분쟁 지역에는 상담과 회복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언론·플랫폼 기업이 ‘분노형 콘텐츠’ 대신 ‘해결형 콘텐츠’를 확산할 때 세제 혜택이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도 방법이다.


〈트리거〉는 총이라는 도구를 통해 분노 유통망의 최종 목적지를 보여줬다. 총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감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지만, 현실에서는 방아쇠를 누르지 않고도 분노를 해소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이 ‘이기적 이익’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 분노의 유통망을 오간다. 오늘 내가 누르는 ‘공유’나 ‘좋아요’ 버튼이 누군가의 방아쇠를 가볍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유통했는가, 분노였는가 아니면 해법이었는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김한준의 신중년 인생 3모작]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