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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준의 신중년 인생 3모작]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 후반전을 디자인하라

“퇴직 소식 들었어요?” “네, 아직은 실감이 안 나네요.” “그래도 앞으로 뭘 할지 계획은 있으시죠?” “…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요."

짧은 대화 속에 퇴직을 앞둔 중장년의 복잡한 마음이 스친다. 겉으론 담담해 보여도 속은 ‘변화 공포증’에 시달린다. 회사라는 울타리가 사라질 때 직함·관계·수입까지 함께 사라지는 듯한 상실감이 밀려온다.


퇴직을 앞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경제적 공백’만이 아니다. 더 깊은 두려움은 ‘정체성의 증발’이다. 수십 년간 쌓은 직함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관계망 단절에서 오는 고립감, 선배들의 소극적 삶에서 보는 불안한 예고편, 건강·재무·역량에 대한 자기 확신의 붕괴가 그 두려움의 실체다.


이 두려움은 방치하면 ‘마음의 시차’로 이어진다. 몸은 퇴직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출근길에 있다. 이 상태에선 변화가 기회가 아닌 고통이 된다. 후반전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으려면 ‘사전 적응 훈련’이 필요하다. 직장에 있을 때부터 마음의 엔진을 후반전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다.


첫째, 관계 재설계다. 직장 중심의 인간관계를 ‘직함 없는 관계망’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회사 동료가 아닌 이웃, 동호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경험을 늘려야 한다. 서울의 한 금융사 부장은 퇴직 3년 전 주말마다 농촌 봉사활동에 참여하며 전혀 다른 사회망을 만들었다. 퇴직 후 그는 귀농 창업을 했고, 그 네트워크가 생계와 일상의 기반이 됐다.


둘째, 직무 탈피다. 직장에서 하던 업무와 전혀 다른 기술이나 분야를 경험해 보는 ‘역할 스트레칭’이다. 예를 들어, IT기업 엔지니어가 주말에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거나, 공무원이 온라인 마켓 판매를 배우는 식이다. 새로운 역할을 경험하면 ‘나는 이것밖에 못 한다’는 자기 한계가 깨지고, 퇴직 후 선택지가 확장된다.



셋째, 경제적 쿠션 마련이다. 재무전문가들은 이를 ‘심리 안정 자금’이라 부른다. 생계비만이 아니라, 퇴직 후 2~3년간 시도와 실패를 감당할 여유자금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다. 이 자금이 있어야 새로운 도전에 불필요한 공포가 줄어든다.


넷째, 호기심 회로 켜기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행복의 원천 중 하나로 ‘몰입’을 꼽았다. 몰입은 두려움을 줄이고 설렘을 키운다. 직장 생활 중에도 새로운 분야의 강연, 짧은 여행·창작활동에 투자하는 습관을 가지면 퇴직 후 ‘무엇을 할까’보다 ‘이걸 해보자’가 먼저 작동한다.


이 모든 준비의 핵심은 ‘퇴직=은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퇴직은 고용계약의 종료지만, 은퇴는 삶의 목적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독일 경영학자 페터 드러커는 “인생 후반전에 새로운 사명을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 사명은 사회적 명분이 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아침에 기꺼이 일어나게 하는 이유’ 면 충분하다.


후반전을 설레는 시간으로 만들려면, ‘정년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년병은 나이·직함·관행이 만든 자기 검열이다. 이를 깨려면 나만의 ‘후반전 언어사전’을 만들어보라. ‘퇴직자’ 대신 ‘시즌 2 플레이어’, ‘노후’ 대신 ‘프리미엄 시즌’ 같은 나만의 용어를 쓰면 사고가 바뀌고, 시선도 달라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마음 준비 전략’이다. ① 불확실성을 자연스러운 생애 주기로 받아들이기, ② 지금의 나를 정의하는 직함 대신 가치·관심사로 자기소개하기, ③ 실패를 학습의 일부로 간주하기. 이렇게 사고방식을 바꾸면, 변화는 더 이상 위기감이 아닌 성숙의 과정이 된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은, 내가 태어난 날과 내가 왜 태어났는지 깨닫는 날”이라 했다. 퇴직은 그 두 번째 날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다. 변화의 문 앞에서 주저앉을지, 설레며 열어젖힐지는 결국 나의 준비 상태가 결정한다.

설렘은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를 연습하고, 내일을 위한 관계·역량·경제적 쿠션을 미리 쌓아가는 순간, 후반전은 더 이상 미지의 공포가 아니라 내가 디자인한 무대가 된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나만의 인생 시나리오다.

출처 : 경인종합일보


https://www.jonghap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6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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