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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이후의 품격–여가·관계·지역, 삶의 새로운 인프라

–여가·관계·지역, 삶의 새로운 인프라

“퇴직 이후 매일이 자유일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아 오히려 불안하더군요.”라는 한 퇴직자의 고백은 많은 중장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직장을 떠난 이후 남겨진 것은 공허한 시간과 낯선 일상이며, 통계청이 2024년 발표한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55~79세 인구의 71.8%가 계속 일하기를 희망했고 평균 희망 근로 연령은 73.3세로, 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


여가와 시간 관리의 부재는 심리적 불안을 심화시키는데, 『100세 시대 퇴직설계』 보고서는 직장 생활에 몰두했던 사람들이 퇴직 이후 늘어난 여가 시간에 적응하지 못해 무기력과 우울감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2024년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평일 여가시간은 3.7시간, 휴일은 5.7시간으로 꾸준히 증가했지만 절반 이상(54.9%)은 혼자 보내는 것으로 나타나, 시간이 늘었을 뿐 삶의 질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퇴직 전부터 여가 습관을 들인 사람은 새로운 삶의 리듬을 유지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공허감에 쉽게 빠진다.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는 말처럼 여가도 연습이 필요하므로, 퇴직 3~5년 전부터 취미나 동호회에 참여해 “나는 이 활동으로 만족하는가”를 경험해야 한다.


여가는 개인의 즐거움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과 사회와 연결될 때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된다. 노사발전재단 우수사례집에 따르면 한 퇴직자는 등산 동호회 활동을 계기로 사회적 기업에 취업하게 되었는데, 이는 취미와 모임이 소일거리를 넘어 제3의 커리어와 사회적 기여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수원문화재단은 온라인 동호회 검색 서비스를 제공해 누구나 쉽게 관심사별 모임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시놀’ 같은 플랫폼은 여행·걷기·봉사활동 등 다양한 커뮤니티를 연결하여 사회적 고립을 줄이고 있다. 이러한 플랫폼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니어 놀이터로 기능하며 오프라인 활동으로도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그러나 인프라는 여전히 대도시에 집중돼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주민의 문화시설 이용률은 60%에 이르지만 농어촌은 30%대에 머무르며, 경로당과 노인교실 등 여가복지시설이 전국적으로 약 7만 개소 운영되고 있음에도 접근성과 프로그램의 다양성은 부족하다. 결국 퇴직 이후 삶의 질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불평등 구조를 안고 있으며, 따라서 지역 기반 여가·문화 인프라 확충은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 국가 균형발전 전략의 일부로 다뤄져야 한다. 각 지자체는 ‘50+ 문화복지센터’를 권역 거점으로 지정해 평생학습·여가·사회참여 프로그램을 통합 제공해야 한다.


고용노동부와 노사발전재단이 운영하는 중장년내일센터는 이러한 지역 격차 해소의 중요한 거점이다. 현재 전국 31개소에서 전직 준비, 재취업, 창업뿐 아니라 산업 맞춤형 직무훈련을 지원하지만, 여가와 문화는 여전히 보조 영역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는 단순한 고용지원센터가 아니라 일·여가·학습·관계를 통합하는 ‘원스톱 생애설계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하며, 직업 상담과 함께 지역 동호회, 평생교육 과정, 문화시설 정보까지 연계해 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는 퇴직 이후 삶의 지속성과 균형을 높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행복한 퇴직 이후의 삶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으며 제도적·사회적 기반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첫째, 지역 격차를 줄이는 여가·문화 인프라 확충. 둘째, 퇴직 전부터 여가를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적 장치. 셋째, 중장년을 사회의 자산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일본은 50세 전후를 ‘세컨드 라이프 준비기’로 규정해 기업 차원의 교육과 문화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는데, 우리 역시 퇴직 이후의 삶을 사회 전체의 과제로 바라봐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다. 퇴직 이후의 하루는 길고 그 하루의 질이 삶의 품격을 결정한다.

괴테는 “인생은 짧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낭비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여가를 단순 소일거리가 아닌 성장과 공동체 연결의 자산으로 바꿀 때 퇴직 이후의 삶은 충만해질 수 있다. 준비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 그것은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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