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정년을 했으니 이제 마음도 내려놓아야 하나요?” 퇴직을 앞둔 지인이 던진 질문에 순간 대답이 막혔다. 연금과 건강 검진표는 준비했지만,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이 물음은 사실 수백 년 전 조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평생 붙잡고 씨름했던 질문과 다르지 않다. 학문과 삶을 일치시키려 했던 그는 당대 최고의 대학자인 동시에 제자 교육과 국가 의례 정비에도 힘썼다. 그가 남긴 공부법은 오늘의 은퇴자들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길잡이다.
퇴계가 보여준 길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자기 수양(修養)과 겸허함, 둘째는 의리(義理)에 합당한 삶, 셋째는 자연(自然)과의 조화, 넷째는 배우고 나누며 공동체와 함께하는 삶, 곧 學問(학문: 배우고 묻는 공부)·分享(분향: 나누고 함께 향유하는 삶)이다. 이 네 갈래는 오늘날 정년 이후 인생을 다시 설계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나침반이 된다.
먼저, 자기 수양과 겸허함이다. 퇴계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학문의 출발로 삼았다. 작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큰 뜻도 무너진다고 보았다. 은퇴 후에도 자기 관리가 우선인 이유다. 하루를 돌아보며 욕심에 치우치지 않았는지 성찰하고, 잘못은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는 관계와 존엄을 지켜준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 챙김’이다. 아침의 짧은 호흡, 저녁의 하루 기록 같은 작은 습관이 은퇴 후 삶의 균형을 떠받친다.
둘째, 의리(義理)에 합당한 삶이다. 퇴계는 벼슬보다 도리를 중히 여겼다. 수차례 사직을 청하며 원칙을 지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오늘의 은퇴 세대에게 의리는 직장에서의 성과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퇴직 후라도 작은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신뢰와 원칙을 지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태도는 은퇴자의 명함보다 더 오래 남는 자산이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자리보다 도리”다.
셋째,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퇴계는 병든 몸으로도 산수를 벗 삼아 도를 읽었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길을 찾았다. 은퇴자는 성과 중심의 일터에서 내려와 자연의 리듬 속에서 삶의 속도를 다시 배울 수 있다. 텃밭을 일구며 씨앗이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고, 산책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존재 방식을 바꾸는 공부다. 오늘날 기후 위기 시대에 퇴계의 태도는 더욱 절실하다.
넷째, 학문(學問)·분향(分享)의 삶, 즉, 배우고 나누며 공동체와 함께하는 삶이다. 퇴계는 앎을 혼자만의 성취로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제자와 벗과 함께 수양하며, 후학을 길러내고, 공동체의 도덕을 세우는 데 힘썼다. 은퇴자는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사회에 돌려줄 수 있다. 도서관 글쓰기 모임, 청소년 멘토링, 평생학습 강의, 자원봉사단 참여가 모두 그 길이다. “내 경험이 아직 쓸모 있구나”라는 자존감은 나눔에서 되살아난다.
퇴계의 공부법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다. 하루를 관리하는 작은 습관, 원칙을 지키는 결단, 자연을 통해 배우는 겸손, 그리고 배움을 나누는 실천이 모여 삶을 새롭게 구성한다. 정년은 직장의 멈춤이지만, 은퇴는 다시 삶의 방향을 세우는 기회다. 숫자와 재무만으로는 노후가 지탱되지 않는다. 품격 있는 후반전은 결국 ‘사람답게 사는 길’에 달려 있다.
퇴계가 남긴 네 가지 길은 오늘의 은퇴 세대에게 명확한 인사이트를 준다. 스스로를 단련하며 욕심을 다스리고, 옳음을 좇아 원칙을 지키며, 자연 속에서 균형을 회복하고, 배움을 나누며 공동체와 연결되라. 인생 3모작의 후반부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준비가 아니라 이 네 가지 태도를 일상 속 루틴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정년은 인생의 쉼표에 불과하다. 은퇴 이후 삶을 풍요롭게 하는 힘은 결국 자기 수양·의리·자연과의 조화·학문·分享(분향: 나누고 함께 향유하는 삶)이라는 네 갈래 길을 일상 속에서 이어가는 데 있다. 퇴직자라면 더 이상 직함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말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욕심을 줄이고, 도리를 좇으며, 자연을 벗 삼고, 배운 것을 나누는 다짐이야말로 후반전을 빛내는 최고의 자산이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인생3모작 전문가】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LH인재개발원 미래설계지원센터장, 국토교통인재개발원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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