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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이후의 품격-재무와 일자리의 균형

김한준 박사의 신중년 인생설계

“선배님, 퇴직하시고는 여유가 많으시겠어요?”

“여유라니, 오히려 불안하지. 시간은 남는데, 돈이 따라주질 않네.”


짧은 대화 속에 퇴직 이후 세대가 맞닥뜨리는 현실이 담겨 있다. 직장에서는 급여가 들어왔지만, 퇴직 이후에는 연금과 저축만으로는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생활비 구조는 그대로인데 소득원이 줄어들면, 품격 있는 삶을 논하기 전에 생존의 압박을 먼저 느끼게 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인구의 절반 이상은 “생활비 마련”을 계속 일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실제로 60대 가구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280만 원 안팎인데, 공적연금 평균 수령액은 100만 원을 밑돌아 격차가 발생한다. 결국 퇴직 이후에도 경제적 활동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삶의 지속성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재무 구조의 문제는 단순히 소득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재직 시기에는 일정한 급여로 지출을 관리했지만, 퇴직 이후에는 예기치 못한 의료비와 가족 지원 비용이 빈번히 발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1인당 연평균 의료비는 2015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은퇴 세대의 재무 설계에서 ‘예상치 못한 지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반면, 미리 준비한 사례는 다르다. 노사발전재단 우수사례집에는 퇴직 직전 재무 상담을 통해 생활비 구조를 재편한 한 퇴직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고정비와 변동비 분리’, ‘생활비 자동이체 시스템’을 통해 지출을 통제하고, 소규모 온라인 창업으로 일정한 현금 흐름을 확보했다. 결과적으로 생활은 단출해졌지만, 불안은 줄고 삶의 만족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이처럼 퇴직 이후 재무와 일자리의 균형은 단순한 경제적 안정을 넘어 삶의 품격을 좌우한다. 그러나 우리 제도는 여전히 분절적이다.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중장년내일센터는 재취업과 창업 교육을 제공하지만, 재무 상담은 별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금융기관의 퇴직설계 서비스는 상품 판매 중심에 치우쳐 있고, 지역의 복지관 상담은 생활비 보조 수준에 그친다. 퇴직자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은 ‘재무–일자리–생활’이 연결된 종합 설계다.


따라서 필요한 변화는 명확하다. 첫째, 현금흐름 중심의 재무 교육이다. 자산 총액이 아니라 월 단위 지출 관리, 의료비·돌발 비용 대비 전략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둘째, 소규모 경제활동 지원이다. 전업이 아닌 시간제·프로젝트형 일자리, 온라인 창업·재능 판매 플랫폼과 연결해 소득의 숨통을 틔워야 한다. 셋째, 지역 기반 상담체계 구축이다. 금융·고용·복지 상담을 한 곳에서 통합 제공하는 ‘중장년 라이프 센터’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퇴직 이후 경제활동은 ‘생계형’과 ‘자아실현형’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소규모 일자리라도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는 창구가 되고, 재무 설계는 단순히 돈을 지키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과 품격을 지켜주는 장치다. 일본이 50세 이후 근로자를 위한 ‘세컨드 잡(second job)’ 제도를 제도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퇴직 이후 재무와 삶의 균형-버티기에서 균형의 이미지

삶은 결국 균형을 잃을 때 흔들린다. 과거 직장에서 쌓은 경력과 소득이 퇴직과 함께 끊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품격 있는 후반전을 결정한다.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 단장이 “우리가 가진 조건에서 최고의 경기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듯, 퇴직 이후의 경제도 마찬가지다. 가진 자산과 능력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이제 물어야 한다. 우리는 퇴직 이후 경제를 여전히 ‘버티기’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균형’을 설계하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품격 있는 삶은 우연히 오지 않는다. 재무와 일자리의 균형을 스스로 찾아낼 때, 비로소 퇴직 이후의 자유가 진짜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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