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1950년대 제주에서 시작해 2025년 서울까지, 약 70년의 세월을 사계절에 비유해 풀어낸 시대극이다. 주인공 애순과 관식의 삶은 고된 현실 속에서도 사랑과 인연, 삶의 의미를 탐색해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폭삭 속았수다’라는 제목은 제주 방언으로 ‘수고 많았수다’를 뜻하며, 그 말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담겨 있다. 슬픔과 후회, 사랑과 감사까지, 살아온 세월의 굴곡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표현인 셈이다.
극 중 애순은 시인을 꿈꾸던 당찬 소녀였지만, 전쟁과 가난,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그 꿈을 접고 살아간다. 남편인 관식은 제주에 남아 묵묵히 가족을 부양하고,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끝에 다시 마주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애순이 귤나무 아래 앉아 관식에게 “니가 없었으면 나 여기까지 못 왔수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인생을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 장면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지금 나는 어떤 계절을 살고 있는가?’
〈폭싹 속았수다〉는 단지 한 남녀의 인연을 넘어, 인생 후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생명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생아의 기대수명은 평균 83.5세다. 은퇴 후에도 20~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시대, 단일한 직업 경력만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문제는 이 길어진 후반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이다.
이처럼 은퇴 이후의 삶이 길어진 지금, ‘인생 3모작’이라는 개념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1모작은 생계를 위한 시기이고, 2모작은 경력과 사회적 역할을 확장해 온 시기라면, 3모작은 마침내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시간이다. 가족과 조직을 위해 헌신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활동을 넘어, 정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깊은 여정이 된다.
드라마 속 애순은 결국 펜을 든다. 늦었지만 그녀 안의 꿈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결국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남긴다. 3모작 인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좋아하는 일, 의미 있는 일, 그리고 나를 닮은 일을 다시 찾는 것, 그것이 3모작의 시작이다.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배우고 싶었던 악기, 봉사활동, 손주와의 시간처럼, 일상의 작은 기쁨도 충분히 훌륭한 3모작이 될 수 있다. 남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에 달려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책방을 운영하며 동네 아이들과 시를 쓰는 지인이 있다. 그는 “지금이 가장 나다운 시간”이라며, 은퇴를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제2의 봄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제는 ‘노년’이라는 단어에 갇히기보다는, ‘다시 쓰는 인생’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자신만의 삶을 이어가는 시대다. 단절과 상실이 아닌, 재발견과 연결로 하루하루를 채우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으로 증명하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는 우리에게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첫째, 나이는 더 이상 꿈의 적이 아니다. 늦게 피어난 꽃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둘째, 인생의 겨울도 다시 시작될 수 있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삶은 언제나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셋째, 삶의 가치는 직함이나 성취보다 관계와 기억, 그리고 나답게 살아온 흔적에 있다는 점이다.
“수고 많았수다.” 이 말은 단지 지난 시간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에도 건넬 수 있는 격려여야 한다. 이제 우리도 귤나무 아래 앉아, “잘 살아왔다”고 말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당신의 인생 3모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당신다운 시작일 수 있다.
김한준 [비전홀딩스 원장,평생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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