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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준의 신중년 인생3모작] 신중년 정책,

이제는 판을 갈아엎어야 한다– 낡은 틀로는 인생 3모작을 담아낼 수 없다

퇴직을 앞둔 어느 50대 공무원이 말했다. “교육은 많이 받았는데, 정작 퇴직 후 삶은 여전히 막막합니다. 책자만 가득 쌓였을 뿐이지요.” 이 짧은 고백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신중년 정책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많은 제도가 있고, 기관별로 프로그램은 넘쳐나지만, 정작 현장에서 신중년이 체감하는 것은 ‘불안의 연장’이다.


우리 사회는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불과 몇 년 뒤면 초고령사회로 들어서고, 전체 인구의 40% 가까이가 중장년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공공기관, 지자체가 운영하는 정책은 여전히 조각난 섬처럼 흩어져 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퇴직설계를, 고용노동부는 경력지원제를, 노사발전재단은 내일센터를,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은 캠퍼스를 운영한다. 이름은 다채롭고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신중년의 삶은 여전히 좁은 골목길에 갇혀 있다.


문제는 이 제도들이 시대의 요구를 읽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로부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다. 『신약성경』의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디지털 전환과 AI 시대를 맞은 신중년에게 여전히 20세기식 재취업 훈련만 권하는 정책은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붓는 격이다. 일자리 박람회와 단편적 강의로는 더 이상 인생 3모작을 열어갈 수 없다.


더구나 현 제도의 운영 방식은 참여자 수와 교육 이수율에 집착한다. 몇 명이 프로그램을 들었는지가 성과 지표의 전부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퇴직 6개월 뒤, 1년 뒤에 그들이 얼마나 안정된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어떤 삶의 질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가 진짜 성과다. 지금처럼 사후 관리가 부재한 제도는 마치 씨앗을 뿌려놓고 싹이 트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는 농부와 같다.


지역 간 격차 역시 심각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50플러스 캠퍼스, 가치동행 프로젝트, 다양한 사회공헌 일자리가 마련되지만, 지방의 군 단위에서는 여전히 귀농귀촌이나 단순 공공근로 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결국 신중년 정책이 “수도권 전용품”처럼 작동하면서, 농산어촌의 중장년은 더 깊은 소외를 경험한다. 이 불균형을 방치한 채 ‘전국적 성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 속에서 ‘인생3모작 지원’을 정책 기조로 내세운 점은 출발선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단순한 재취업 지원이나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나열을 넘어서, 신중년을 ‘평생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국가적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정부가 아직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과제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초고령사회로 들어서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미래 방향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판을 갈아엎어야 한다. 첫째, 성과지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교육 이수자가 아니라 재취업 유지율, 사회공헌 지속률, 삶의 만족도를 평가해야 한다. 성과가 측정되지 않는 제도는 존재 의미를 잃는다. 둘째, 통합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각 기관이 따로 관리하는 이력은 신중년을 혼란스럽게 한다. One-ID 경력계정을 만들어 교육·훈련·일자리·사회공헌 기록을 한눈에 확인하고, 그 경력을 기반으로 다음 단계가 추천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 디지털 리터러시와 AI 기초 과정은 모든 센터에서 기본으로 제공되어야 하며, 돌봄·환경·문화복지 같은 신직종 트랙을 공식화해야 한다. 넷째, 지역 균형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지방에는 맞춤형 전환 프로그램을, 수도권에는 고도화된 혁신 프로그램을 마련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고전 『채근담』에는 “인생의 후반전에는 쓸모없는 욕심을 덜어내고, 진정 필요한 것만 지켜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신중년 정책도 마찬가지다. 보여주기식 행사와 실적 집착은 과감히 덜어내고, 실제 삶을 지켜주는 제도만 남겨야 한다. 불필요한 욕심은 버리고 본질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곧 품격 있는 웰에이징의 시작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봉책이 아니다. 제도와 기관이 더 많아지는 것도 답이 아니다. 흩어진 제도를 이어 하나의 길로 만들고,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틀을 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중년 정책이 살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정책 문서와 사례집은 서가에서 먼지만 뒤집어쓴 채, 신중년의 불안만 더 키울 것이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제도로는 새로운 시작도 아니다. 정부와 기관들은 이제 미련을 버려야 한다. “집어치우라”는 말이 거칠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그 결단이 없다면 한국의 신중년은 희망 대신 공허를 안고 후반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길을 내는 것, 그것만이 시대와 세대가 요구하는 진짜 해답이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인생3모작 전문가】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LH인재개발원 미래설계지원센터장, 국토교통인재개발원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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