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시 없인 움직이지 않는 정부를 해체하라
❚ 국민이 묻는다, 당신은 왜 그 자리에 있는가?
대통령의 지시 없이는 어떤 일도 시작되지 않는 나라, 언제까지 손오공이나 슈퍼맨 같은 영웅을 기다릴 것인가. 대형 사고부터 정책 현안까지 매번 최고지도자의 특별 지시가 떨어져야 움직이는 공직사회의 관성은 위험하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이를 오래전부터 ‘복지부동’이라 불렀고, 최근엔 ‘낙지부동’이라는 자조까지 등장했다. 결국 문제는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낡은 관료 체계를 재조립해야 할 때다. 더 미루면 또 다른 참사를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지시를 기다리는 행정의 폐해는 위기 때마다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컨트롤타워 공백과 초기 대응 혼선이 비극을 키웠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선 “주최자가 없다”는 이유로 어느 기관도 질서 유지에 나서지 않았고, 사고 후 정부와 지자체는 책임만 떠넘겼다. 2023년 새만금 잼버리 대회도 부처 간 책임 회피로 파행을 겪으며 국제적 망신을 샀다.
이러한 부실 대응이 반복되자 당시 문재인 정부는 “적극 행정은 면책, 소극 행정은 문책” 원칙을 세우고 감사원도 지원책을 내놨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보신주의적 행정이 지속되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부의 정책을 사후에 단죄하고, 감사 남용과 모호한 법령이 겹치며 공무원들은 위험 부담보다 정체를 선택하고 있다.
해외 선진국의 사례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여준다. 1995년 일본 한신·아와지 대지진 당시 대응 부실로 골든타임을 놓쳤으나 이후 반성 속에 ‘방재의 날’ 전국 훈련, 어린이 재난 교육 등 예방 중심 시스템을 구축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중심으로 재난 대응 시스템을 정비해 노스리지 지진 피해를 최소화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애초에 위기 대응을 특정 영웅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존한다. 평상시부터 연방-주-지방정부와 소방·경찰, 적십자 등 민간조직까지 각자의 역할과 연락망을 매뉴얼로 명확히 정해 두어, 현장에서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독자적 판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분산형 대응체계를 구축해 둔 덕분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지시 없어도 움직이는 정부로 거듭나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
우선 위기 대응 시스템의 대대적 개편이 시급하다. 각종 재난·사고의 유형별로 어느 부처와 기관이 주도권을 쥐고 누구와 협력할지 법령과 매뉴얼을 통해 사전에 명확히 해야 한다. 위기 징후가 보이면 해당 부처와 지방정부, 일선 기관들이 대통령의 일일 지시를 기다릴 것 없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대응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평상시 모의훈련과 교육을 통해 현장 조치 매뉴얼을 숙달시키고, 정보 공유 체계를 일원화하여 초동 대응의 혼선을 없애야 한다.
또한 위기 시 컨트롤타워 부재로 혼선이 빚어지지 않도록 상시 가동되는 범정부 통합대응센터를 두어 유관 부처 간 협조 체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 매뉴얼을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꾸준히 점검·보완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고로 정부도 이태원 참사 후 인파 사고 안전관리 매뉴얼 정비 등을 포함한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을 마련해 위기 대응 체계 개선에 착수한 바 있다.
아울러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의 책임성과 역할도 대폭 강화되어야 한다. 위기가 발생하면 해당 부처 장관이 사실상 대통령을 대리하는 총지휘관이 되어야 하며, 결과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는 문화를 확립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공무원에겐 확실한 면책과 보상이 주어지고, 부작위로 일관한 공무원에겐 그에 상응하는 문책이 따르는 인사 원칙을 정착시켜야 한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 팻말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말처럼, 지도자는 책임을 미루지 않아야 하며, 단기적 영웅주의보다 제도가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위기를 이겨내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슈퍼맨을 기다리는 낡은 관행과 결별하고, 영웅 없이도 국민을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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