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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여가와 자원봉사의 경계 허물기

들어가며 – 자원봉사, 어렵지 않은 여가의 또 다른 얼굴


김성자 씨(66세)는 매주 금요일 오전이면 동네 도서관에 간다. ‘책 읽어주는 할머니’ 활동을 시작한 지 어느덧 4년째다. 처음엔 아는 사람도 없고, 뭔가 대단한 기여를 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그런데 첫날, 자신이 읽어준 동화책 한 줄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고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날 저녁, 그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참 이상하더라. 내가 무슨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기분이 좋아.”
딸은 웃으며 말했다. “엄마, 그게 여가야. 근데 좀 멋진 여가지.”

자원봉사라고 하면 왠지 ‘의무감’이나 ‘성실함’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반면 여가는 ‘자유’, ‘쉼’, ‘즐거움’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중장년의 삶에서 이 둘은 점점 서로를 닮아간다. 김성자 씨의 사례처럼, 타인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하고, 의미를 찾게 하며,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마을길 가꾸기, 도서관 자원활동, 반려동물 산책 봉사, 텃밭 가꾸기, 한글 교육... 이 모든 활동은 의무나 성과가 아닌, “즐거운 여가의 또 다른 모습”으로 여겨진다.

서울시 50+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중장년층이 가장 희망하는 사회참여 방식 중 1위는 ‘지역 자원봉사활동(61.9%)’이었다. 즉, 이들은 생업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어딘가에 ‘쓸모 있는 존재’로 머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쓸모는 반드시 ‘생산성’이 아닌 ‘정서적 가치’에서 나온다.


이제 자원봉사와 여가를 분리해서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은 봉사의 자발성과 여가의 즐거움이 서로의 한계를 상쇄하며, ‘의미 있는 소일거리’라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자원봉사와 여가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중장년의 삶의 방식, 그 심리적 기반과 실천 모델, 그리고 사회적 확장 가능성을 탐색한다.


본문 파트 1 – 여가와 자원봉사의 경계는 왜 흐려지는가


“여가와 자원봉사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한쪽은 쉼이고, 다른 한쪽은 기여다. 하나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위한 시간이다. 그러나 중장년 이후의 삶에서는 이 경계가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 ‘진짜 여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감한다.

퇴직 후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는 ‘마음의 생기 회복’이다. 서울시 50+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사회공헌형 일자리 참여자의 73.5%가 ‘삶의 만족감이 높아졌다’고 응답했다. 단순한 여가활동을 할 때보다 봉사활동이나 공동체 참여에 더 강한 심리적 만족과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 현상의 핵심은 ‘의미 있는 시간 사용’에 대한 갈망이다.

중장년은 이미 “쉬는 법”을 어느 정도 배웠다. 하지만 쉬기만 하는 삶은 어느 순간 공허해진다. 결국 사람은 무언가에 기여하고, 타인과 연결되고,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낄 때 더 깊은 만족을 경험한다. 이때 봉사활동은 ‘노동’의 성격보다는 ‘여가의 확장’으로 다가온다.


여기에는 시대적 변화도 작용한다. 예전에는 자원봉사가 ‘공적인 책임’ 또는 ‘의무적 기여’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개인의 의미 추구와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가볍고 일상적인 봉사-예를 들면 반려동물 산책봉사, 동네 벼룩장터의 운영지원, 독서모임 내 봉사기획 등-는 "재미와 의미가 공존하는 사회참여"로 인식된다.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문화 코드를 만든다. 이를 ‘소셜 여가(social leisure)’ 또는 ‘경험 기반 공헌’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핵심은 활동의 ‘형태’보다 ‘느낌’이다. 그 일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사회에 작게라도 보탬이 되며, 강제나 의무 없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자기 확장의 여가”다.


결국, 여가와 자원봉사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이 시대 중장년들이 "즐겁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의 삶에서 자아실현과 공동체 기여가 충돌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며, 여가와 자원봉사의 통합은 새로운 생애 시간 설계의 지향점이 될 수 있다.

본문 파트 2 – 의미 있는 ‘소셜 여가’가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


정년 이후의 여가는 더 이상 ‘소비와 휴식의 시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의미 찾기’가 여가의 새로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른바 ‘소셜 여가(social leisure)’란, 공동체 속에서 가볍게 참여하고 교류하며, 즐거움과 동시에 정서적 만족과 사회적 연대를 경험하는 활동이다.

서울시 50+세대 대상 여가활동 조사에 따르면, 가장 희망하는 여가 유형으로 “친구모임 및 커뮤니티 활동(50.9%)”이 1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관광, 운동보다 높은 수치였다. 단순한 오락보다 ‘나와 비슷한 이들과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메커니즘이 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사람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소속감—이 없으면 심리적 기능이 무너진다”라고 말했다. 중장년은 퇴직과 동시에 이런 ‘소속감’의 기반을 상실하기 쉽다. 그러나 소셜 여가는 이 상실을 ‘가벼운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원한다.


예를 들어, 지역 푸드마켓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이웃과 인사 나누기, 주말마다 동네 반려견 산책 모임 참여하기, 도서관 낭독회에 참석해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일은 모두 정서적 건강과 연결된 관계 자본을 회복하게 해 준다. 이러한 활동은 정서 회복뿐 아니라 인지 자극, 운동량 증가, 스트레스 감소 등 복합적 건강 효과로 이어진다.

특히, 의미 있는 여가 활동은 우울감 예방과 삶의 회복탄력성에 긍정적이다. 『2022년 중장년 생애설계상담 연구(송민혜)』에 따르면, 정기적인 사회참여활동을 하는 집단은 하지 않는 집단에 비해 삶의 의미감 점수에서 1.5배 이상 높았다. 이는 여가와 기여가 심리적 건강을 강화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임을 보여준다.

또한, 소셜 여가는 ‘주체적 존재감’을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요청 없이 내가 스스로 선택해 나서는 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활동을 통해 느끼는 정서적 보람은 은퇴 후 위축되기 쉬운 자존감을 회복시킨다. “내가 아직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감정은, 실제로 신체의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분비를 촉진시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가가 혼자만의 ‘쉼’에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전환될 때, 그것은 단순한 활동을 넘어 삶의 활력을 되찾는 심리적 치유의 루틴이 된다. 그리고 이 치유의 루틴은 곧 인생 3 모작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심리적 자산이 된다.


본문 파트 3 – 중장년의 여가공헌, 국내외 사례와 모델

‘여가공헌’이란, 중장년이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공동체에 작지만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는 전통적인 자원봉사나 생산 중심의 일자리 개념과 달리, 즐거움과 의미의 균형을 전제로 한 새로운 생애 참여 방식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여가공헌 활동이 지역사회 문제 해결, 사회적 고립 방지, 세대 간 연결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시 50+재단은 2015년 이후 ‘보람일자리사업’을 통해 중장년의 사회공헌형 여가 참여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50+세대 학교 보조강사 파견’, ‘도서관 독서 지원단’, ‘도시재생 현장 활동’ 등은 전문성과 지역 참여의 접점을 만들어낸 대표 사례로 꼽힌다. 2023년 사업평가 결과, 참여자들의 71.2%가 “활동이 삶의 활력이 되었다”라고 응답했으며, 65%는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었다”라고 답했다.


해외에서도 중장년의 여가공헌 활동은 ‘사회적 회복력의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필그림 플레이스(Pilgrim Place)는 은퇴자 중심의 공동체 거주 시설이자 커뮤니티 자원봉사 허브로 기능한다. 주민들은 요리, 교육, 정원관리, 공예 등 각자의 역량을 기반으로 커뮤니티 운영에 참여하며, 이 활동이 일상의 리듬이자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무엇보다 노인 돌봄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하는 주체로 기능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다른 사례로, 일본의 ‘지자이카쓰’(自在活)는 은퇴자들이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작은 사회적 역할을 찾는 여가공헌 모델이다. ‘주 2회 동네 공원 청소’, ‘학교 앞 건널목 지킴이’, ‘아기 돌봄 교대 봉사’ 등은 대가 없는 봉사처럼 보이지만, 지역 내에서의 신뢰와 관계를 자산으로 전환하는 구조다.
일본 정부는 이를 ‘노인 복지’가 아닌 ‘지역 역량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발적 참여가 고독사 감소, 범죄 예방, 세대 연대 형성에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많은 50+세대가 “단순히 쉬고 싶지는 않다”, “뭔가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이 바람은 결코 거창하거나 대단한 봉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의 관심과 재능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조용한 자긍심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 있는 여가’라는 이름으로 삶에 자리 잡을 때, 자원봉사와 여가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중장년의 여가공헌은 이제 사회공헌의 보조개념이 아니라, 정서적 건강과 삶의 구조를 지지하는 필수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과로와 책임에서 자유롭고, 기여를 통해 의미를 찾으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시간. 그것이 바로 여가공헌이 제공하는 가장 인간적인 연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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