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실행 시스템의 재설계
“시스템은 사람보다 오래간다.”
공직 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말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역설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진정한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라고 믿어온 결과, 정작 ‘사람 뒤에 숨어 시스템을 망가뜨린 관행’이 공직사회 곳곳에 고착되어 있다. 지난 수개월간 이어진 고물가 대응 실패, 정책 실행 지연, 반복되는 현장 사고는 모두 한 가지 공통된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 바로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정부”, 자율성 없는 행정 체계의 실체다.
이제 우리는‘슈퍼맨을 기다리는 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유능한 리더가 등장해도 지속 가능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정치는 바뀌더라도 행정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정권의 명령이 없어도 현장이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해법은 명확하다. 공무원이 ‘지시받는 자’가 아니라, 이름을 걸고 행동하는 ‘실행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 공직사회에는 오래된 병폐가 하나 있다. 실패해도 누가 책임졌는지 묻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책이 지연되고 결과가 왜곡되어도 실명은 문서에서 지워지고 결재란만 남는다. 익명의 책임은 곧 무책임을 의미한다. 관료는 위험을 피하려 하고, 정무라인은 책임을 떠넘긴다. 결과적으로 행정은 신뢰를 잃는다. 이것이 바로 ‘익명 행정’의 구조적 한계다.
일본은 1995년 고베 대지진의 경험을 계기로 이 구조를 개혁했다. 중앙정부는 ‘지휘 명확화 원칙’을 수립해 부처별 위기 대응 책임자의 실명을 매뉴얼에 명시하고, 사전 훈련부터 실제 대응까지 권한과 책임을 실명 단위로 명확히 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이 시스템은 일정 부분 작동했으며, 이후 내각회의를 통해 지속 보완되었다.
일본이 위기 대응 과정에서의 ‘실명 책임 시스템’을 확립했다면, 스웨덴은 평상시 정책 집행의 모든 단계에서 실명과 자율의 원칙을 정착시킨 국가다. 스웨덴 정부는 ‘자율성 있는 관료제’를 표방하며 국장급 책임관이 독립적으로 예산과 정책을 운영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정책 기획과 집행, 사후 보고까지 실명 책임 하에 이루어지며, 국회의 질의응답 또한 익명이 아닌 개인 명의로 책임 있게 답변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공직자의 자율성을 권한이 아닌 책임의 방식으로 정의하며, 실명화를 통해 책임 회피보다 감수를 제도화한 구조로 평가된다.
우리도 이제 ‘책임 실명제’를 도입할 때다. 정책 입안자, 실행 책임자, 평가 담당자의 이름을 문서에 명시하는 구조는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과 피드백, 그리고 공직 신뢰의 핵심이다. 각 부처의 중간 관리자급 이상에게는 일정 범위 내의 예산과 현안 대응 권한을 부여하되, 그 권한 행사의 결과는 명확하게 남도록 설계해야 한다. 책임에는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실패는 혼자 감당하되, 성공은 조직 전체가 공유하는 구조 역시 개편의 대상이다.
이런 시스템은 사후 평가 체계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정책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어떤 판단을 했으며, 그 판단이 어떤 조건에서 내려졌는지를 되짚을 수 있어야 제도가 스스로 학습하고 발전할 수 있다. 익명 속에서 이뤄진 정책은 실패해도 반성 없이 반복되지만, 실명 하에 이뤄진 결정은 실패조차 다음을 위한 자산이 된다. 결국 행정은 신뢰의 과학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투명한 절차와 구조적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책임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 익명 시스템은 결코 무너지지 않지만, 동시에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누구의 판단을 따르고, 누구에게 기대야 할지 알 수 없다. 결국 무책임이 반복되고, 조직은 멈춘다.
이 지점에서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은,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이 말은 이름 없이 헌신하며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 온 이들이 결국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의미다. 공직사회도 다르지 않다. 변화는 영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책임자들이 주도한다. 제도가 투명하고 책임이 명확할 때, 비로소 행정은 신뢰를 얻고 지속가능한 리더십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선언해야 한다.
“정책은 자율로, 책임은 실명으로.”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는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개인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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