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기관의 ‘책임 외주화
“책임은 묻지 않으면서, 계약은 외운다.”
2024년 하반기, 경기 안산의 한 공공하수처리장 보수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질식사고 현장을 조사하던 감사관이 남긴 말이다. 사망한 노동자는 3단계 하도급을 거쳐 작업에 투입되었고, 발주처 공공기관은 ‘하도급 금지 조항’이 계약서에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사고 직전까지 현장에 있었던 감리자나 감독관의 존재는 불분명했고, 하도급 실체를 몰랐다는 해명은 공허하게 들렸다. 공공기관이 ‘형식적 계약서’만으로 면책을 주장하는 현실(감사원, 2024.11), 이 구조적 무책임이 또 하나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망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하청, 재하청, 그리고 삼중 하청 구조가 도마에 오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바로 “감독자는 어디 있었는가”다. 실제로 많은 사고에서 발주기관은 계약서상 하도급 금지 조항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한다. 그러나 문제는 서류가 아니라 현실이다. 수의계약, 위임계약, 분리발주 등 다양한 계약 방식 속에서 감리자의 실질 권한은 제한되고, 현장 감독은 무력화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환경공단, 수자원공사, 도로공사 등은 반복적으로 ‘책임 외주화’ 문제로 지적받아 왔다.
예컨대 2023년 감사원은 전국 14개 공공기관의 42개 공사 현장을 감사한 결과, 무려 70%가 감독 권한의 외주 위탁 또는 부실 감독으로 인해 안전관리 공백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하도급 금지”를 명시하고도 실제로는 제3의 업체가 작업을 수행한 사례가 다수였고, 이때 책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계약서와 다르게 움직이는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독 부재의 본질은 ‘실명 없는 책임구조’에 있다. 현재 다수 공공기관은 발주 후 계약관리 업무를 외부 전문기관 또는 감리업체에 위임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실제 감독자 이름은 계약서나 현장 게시판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장 사고 발생 시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데만 수일이 걸리는 일도 흔하다. 이런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책임의 해체’를 야기하며, 그 피해는 일선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결국, 문서에는 조항이 있지만, 현실에는 사람이 없다.
해외 선진국들은 이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독일의 경우 ‘Bauleiter’라 불리는 현장 건설감독자는 공사 승인 시 법적으로 실명 등록되며, 사고 발생 시 직접 책임을 진다. 또한 하도급 계약도 실시간 온라인 시스템에 등록되어 발주처가 이를 상시 모니터링하게 되어 있다. 노르웨이도 ‘안전감독자 실명제’를 통해, 발주기관 소속의 전담자가 공사 단계별 감독 책임을 지고, 위반 시 형사 책임까지 묻는다. 반면 한국은 발주기관은 ‘계약상 책임 없음’을 주장하고, 감리업체는 ‘지시권이 없었다’며 발을 뺀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모든 공공 발주공사에 ‘계약감독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계약서에는 반드시 실명과 직책이 명시되어야 하며, 책임 범위 역시 법적 근거에 따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둘째, ‘하도급 금지’ 조항이 무력화되지 않도록 하도급 실태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위반 시 기관 자체에 과징금 또는 입찰제한 등의 실질적 페널티를 부과해야 한다. 셋째, 공공기관의 계약관리 업무는 외주화가 아니라 내부 감독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계약담당과 현장감독 기능을 명확히 분리하되, 의사결정의 연결 고리는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통합 ‘공공감독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공공기관이 스스로를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중간 관리자’로 인식하는 순간, 책임은 증발한다. 발주기관은 비용의 계산자일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최종 책임자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구조적 안전은 조항이 아니라 ‘사람의 책임’에서 비롯된다.
“공사의 실명은 있지만, 감독의 이름은 없다.”
이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제 계약서가 아닌 현장에 책임자를 세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