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산업안전 패러다임
“사람의 생명보다 값싼 비용은 없다.”
이 말은 2024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산업안전 포럼에서 인용된 문구로, 단순한 수사 이상의 울림을 담고 있다. 독일, 일본, 노르웨이 등 산업안전 선진국들은 이 원칙을 제도로 구체화했고, 산업현장에서 생명이 우선되는 구조를 실현하고자 끊임없이 제도를 고안하고 개선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현장은 아직도 ‘안전은 비용’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와 사회는 안타까움을 표하고 임시방편적인 대책을 내놓지만, 실제로는 그 구조 자체가 반복된 사고를 용인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애도가 아니라, 실효적 시스템의 설계이자 구조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어떤 구조와 법제도를 통해 산업안전의 기준을 높여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선언이 아니라 설계된 시스템 – 독일의 사전 승인제
독일은 고위험 작업이 예정된 모든 현장에서 착공 전에 연방노동청(Bundesagentur für Arbeit)의 사전 안전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경우 ‘안전문서 제출 + 현장 실사 + 정기보고’가 필수로 적용되며,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빠지면 작업은 불허된다. 승인은 형식이 아닌 실질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를 무시한 착공 시 원청뿐 아니라 발주처도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업들은 ‘예방’을 위한 투자를 비용으로 간주하지 않고, ‘생존 전략’으로 간주하게 된다.
절대책임의 원칙 – 일본의 산업안전관리 모델
일본은 2006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당시 ‘원청 절대책임제’를 도입하여, 하청 노동자 사망사고 발생 시 원청이 직접 책임을 지도록 규정했다. 이 원칙은 계약에 따른 책임 회피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원청은 현장 관리 감독을 실명제로 수행해야 하며, 사고 발생 시 현장 책임자의 실명과 판단 내용이 공개되며, 정부는 이를 토대로 감독 책임을 직접 추궁한다. 이처럼 책임의 무게를 계약이 아니라 제도로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다른 구조적 시사점을 준다.
노동자의 권리이자 시스템 – 노르웨이의 참여형 안전문화
노르웨이는 산업안전을 단순한 규정이 아닌 노동자의 권리로 간주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모든 사업장에는 ‘산업안전대표(Safety Delegate)’가 법적으로 선출되며, 이들은 작업 중지권과 의사결정 참여권을 가진다. 이들은 단순히 형식적인 대표가 아니라 법적 권한을 가진 행위자로서, 교육도 국가가 직접 수행하고 있으며, 고위험 업종일수록 노동자 참여 없는 안전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제도 전반에 깔려 있다.
비용인가, 가치인가 –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반면, 한국은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장 적용에서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전가되거나, 대기업은 법망을 피해 가는 구조를 구축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안전관리 역량 자체가 부족해 제도 수용이 어렵다. 이는 법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제도의 철학과 설계 자체가 생명을 우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선진국의 산업안전 제도에서 배워야 할 것은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그들이 생명을 다루는 태도다. 사전 승인제, 실명 감독 책임제, 노동자 참여 구조는 모두 안전이라는 가치를 계약이 아닌 시스템으로 다루는 방식이며, 이는 선언이 아닌 실질이 되어야 한다. 생명은 말로 지켜지지 않는다. 법과 제도, 책임의 구조 안에서만 보호받을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시급히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또 죽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그 죽음을 막지 못했는가”여야 한다. 선언보다 강력한 제도, 위에서만 지시하는 구조가 아니라 아래에서 참여하는 시스템. 그것이야말로 안전을 비용이 아니라 ‘공공의 가치’로 대우하는 첫걸음이다.
✔ 생명은 선언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제도로 응답할 때, 비로소 안전은 공공의 자산이 된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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