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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준 Sep 22. 2022

삭막한 세상에서 명멸해가는 빛이여

<인사이드 르윈> - 조엘코엔

 <인사이드 르윈>은 ‘솔로 가수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르윈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여자친구의 낙태 문제, 교수의 고양이 분실, 솔로로써 인정 받지 못함을 겪고 좌절해서 다시 선원이 되려고 하지만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다시 솔로 가수를 꿈꾸는 생활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영화 제목이 <인사이드 르윈>인 만큼 코엔 감독은 차가운 현실에서 예술가를 꿈꾸는 이의 속사정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이 시선 속에서 우스워보이기도 하는 르윈. 영화는 이 세상에 맞설 수밖에 없는, 꿈을 가진 청년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장면장면 세부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인 화면 연출 컨셉을 먼저 말해보겠다. 영화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빛이 번져있다.(블랙 프로미스트 필터) 영화 <러브레터>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러나 그 쓰임은 <러브레터>와 정반대다. 이 낭만적인 화면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주인공의 인생과 대비된다. 분명 르윈이 꿈을 가지고 노력한다는 데에서 이 화은 그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르윈의 꿈은 번번히 좌절당하며 전혀 낭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화사한 화면은 르윈의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나타내며 비극적인 처지를 강조하고 낭만을 기대하는 관객에게 그의 꿈을 응원하게 만든다.

 영화 속 르윈의 움직임은 항상 종적 움직임, 즉 카메라를 향해 다가오거나 카메라에서 멀어지는 움직임만이 비춰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횡적 움직임과 대비된다. 화면에서 인물이 가로로 움직일 때에는 그 역동성이 강조되고 그가 향하는 장소에 대한 정보가 프레임에 나와있지 않기에 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종적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그 공간감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인물의 움직임에 대한 역동성이 상당히 감소한다. 그리고, 관객의 눈이 카메라라고 가정한다면, 결국 카메라를 향해서 오거나 멀어지는 인물은 그 목적지에 대한 정보가 이미 관객에게 드러나있기에 지루하고 목적의식이 없어 보인다.

    이런 르윈의 종적 움직임은 그가 처한 상황을 암시하는 역할을 해낸다. 그는 현재 현실에 갇혔으며 어딘가를 향해 가지만 역동적이지 않다. 즉, 그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런 인물의 움직임은 영화<로마>와도 비교할 수 있다. <로마>의 주인공 클레오는 시종일관 횡적으로 움직인다. 비록 르윈처럼 사회적 벽에 가로막혀 갇혀있지만 횡적으로 움직인 클레오는 그 벽을 극복해낸다. 종적으로 움직이는 르윈은 벽에 가로막혀 돌고돌기를 반복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톤은 무채색이다. 특히 르윈이 도심 속에 있을 때 이 무채색의 환경은 더욱 심화된다. 날씨는 항상 흐리고 환경은 삭막하다. 마치 르윈이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무채색의 톤은 르윈이 겪는 사건에서의 관객의 감정을 심화시키는 역할도 하는 한편, 특정 장면에서는 대비를 만들어내어 그 파장을 크게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교수 집에서의 식사장면과 동행하던 할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장면이다. 

길고 긴 여정 속에서 그는 교수의 집에 다다라서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이 교수집에서의 화목한 식사자리는 따뜻한 톤의 조명과 높은 채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삭막한 세상에서 구르고 굴려진 르윈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식처의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컨트리 송을 부르는 르윈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정되어있지만 이 순간이 르윈의 자격지심으로 인해 깨어졌을 때 그 비극적인 상황은 관객에게 깊이 다가온다. 그리고 르윈은 다시 무채색의 도심으로 나간다.

오디션을 보러 시카고로 향하는 르윈은 큰 몸집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기사와 함께 차에 동승한다. 이 동행하는 과정은 르윈에게 지옥같은 것이었다. 뒷자석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만 떠들어대며 그와 그의 죽은 친구를 조롱하고, 기사는 담배만 펴대며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이렇게 빌드업된 불행은 잠시 쉬러 들른 음식점 화장실에서 터진다. 이 불안한 동행이 어느정도 서로의 속내가 드러나며 안정을 향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이 할아버지가 쓰러지며 단단히 잘못된 불안정을 시사한다. 르윈이 차에 타기 전, 르윈의 각박한 상황을 함께한 관객은 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현실에서 르윈의 감정에 깊이 공감한다. 채도가 없던 전 장면과 대비되는 이 민트색이 지배한 화면은 괴이함을 더하며 그 불안하고 흔들리는 현실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영화를 이루는 무채색 톤의 장면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공 르윈 또한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르윈은 절대 채도가 짙은 옷을 입지 않는다. 항상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르윈의 주변 인물과도 대비된다. 가스등 카페에서 르윈이 서던 무대에 친구이자 불륜상대인 진과 그 남친 짐 그리고 진의 군인 친구가 화음을 쌓으며 노래를 부를 때, 이들은 밝은 조명에 붉은색,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반면 르윈은 객석에서 짙은 그림자 속에 무채색의 옷을 입고 그들을 쓸쓸하게 바라본다. 관객이 르윈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심화된다.  
   

 이제까지 <인사이드 르윈>의 연출, 촬영 컨셉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는 그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와 그 내용상의 특징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일단 그 내용의 특징에서 가장 눈에 띄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바로 가스등 카페에서 공연하고 교수의 집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기까지의 오프닝 시퀀스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두 번의 충격으로 첫 씬의 낭만적인 연주를 하고있는 르윈과 그에 취한 관객을 차가운 현실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가장 먼저 르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아름다운 포크송을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앞서 설명한 낭만적인 빛번짐이 있는 화사한 화면에 담기는 그의 모습은 관객이 이 영화의 장르를 착각하게 만든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클리셰로 가득찬 희망찬 영화. 이 기대는 무대를 끝낸 르윈이 자신을 찾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어두운 밖으로 나갔다가 한 대를 얻어 맞으며 깨진다. 그리고 일어나는 곳은 교수의 집이다. 이곳에서 르윈은 다시 한번 낭만을 표상한다. 그를 깨우는 것은 귀여운 고양이고 그는 풍족해보이는 집에서 기타를 튕기며 감미로운 연주를 한다. 그러나 장면은 바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계란을 휘젓는 르윈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롱쇼트로 감미로운 연주를 하던 르윈에서 소음을 내며 계란을 젓는 르윈의 손 클로즈업으로 넘어가는 이 쇼트의 연결은 정적인 화면에서 동적인 화면으로 넘어가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스매시 컷이다. 관객은 이 스매시컷을 통해 낭만을 가진 이상세계에서 먹고 살기를 고민해야하는 현실세계로 넘어온다.     


 사실 오프닝 시퀀스라고 가스등 카페에서 공연하는 르윈과 교수의 집에서 일어난 르윈을 묶어놓긴 했지만, 두 장면의 시간대는 각각 다르다. 이게 정말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인데, 이 가스등 카페에서 공연하는 르윈은 사실은 영화의 시간대에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이 공연하는 르윈의 장면을 영화의 가장 앞에 위치시킴으로 가지는 효과는 3개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이 장면이 맨 처음에 나옴으로써 관객은 이 장면의 시간 때가 영화의 가장 처음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그 뒤 장면과 연결해보아도 그 연속성에 무리가 없다. 처음이라고 인식했을 때, 이 장면은 여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위에 설명했듯 스매시를 통해 영화의 배경을 나타낸다.


 두 번째는 영화의 수미상관 구조에서 오는 의미다. 이 가스등 카페씬은 영화의 뒤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이를 통해 가스등 카페에서의 공연이 시간대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라고 관객이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챘다고 하더라도 이 장면은 이미 관객의 무의식 속에서 영화 속 시간대의 가장 처음이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르윈이 같은 삶을 반복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느낌은 영화의 연출 컨셉인 종적 움직임과도 상호작용한다. 앞서 말했듯 르윈이 영화 내내 반복하는 종적 움직임은 그가 삶 속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갇힌 느낌을 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결국 이 장면은 영화의 앞뒤, 즉 르윈의 일대기 시작과 끝에서 르윈을 가두며 삶속에 갇힌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다. 가스등 카페 시퀀스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똑같이 반복되지만 그 끝에 나오는 시퀀스는 추가된 요소가 있다. 르윈이 무대에서 두 번째로 부르는 자살한 친구 마이크와 같이 불렀었던 노래와 뒷골목에서 얻어맞은 후의 상황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관객에게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먼저 추가된 노래의 경우 오프닝 시퀀스에선 나오지 않는 노래다. 그럼에도 무대에서 내려온 르윈에게 카페 사장이 말하는 대사는 똑같은데, 영화의 처음엔 ‘마이크’라는 르윈의 친구에 대해서 정보가 주어졌지 않았기 때문에 카페 사장이 ‘마이크와 불렀던 노래네’라고 했을 때 그 대사에 대해서 관객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교수와의 식사자리 장면에서 르윈에게 ‘마이크’와 그와 함께 부른 노래에 대해서 알게된 관객은 르윈이 두 번째 곡으로 마이크와 함께 불렀던 곡을 하고, 카페 사장이 ‘마이크와 불렀던 노래네’라고 말할 때 이 대사의 의미는 관객에게 깊이 다가온다.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친구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가장 힘든 시기에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관객은 르윈의 처참한 상황을 마음 아파하며 바라본다.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뒷골목으로 나간 르윈은 양복을 입은 노신사에게 얻어맞는다. 관객은 영화 처음 이 장면이 나왔을 때는 르윈이 맞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르윈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풍파 정도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노신사가 찾아온 이유인 르윈이 무대에 선 노신사의 부인을 조롱하는 장면을 알게된 관객은 그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인다. 관객은 르윈이 그 부인을 조롱한 이유가 그 자신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고있기 때문이다. 이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성과 노신사가 르윈을 때린 그 순간이 5분정도 추가된 것은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이 영화에서 고양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있는 중요한 메타포로서 작용한다. 르윈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는 존재이자, 르윈 그 자신을 상징하기도, 르윈의 꿈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고양이’라는 존재가 르윈의 캐릭터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먼저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시나리오 작법서 중에 <Save the cat!>이라는 책이 있다. 직역하자면 ‘고양이를 구해라!’ 라는 의미인데 그 이유는 고양이와 유대를 쌓는 캐릭터가 관객에게 작용하는 의미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우리’의 인식 속에서 고양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이자, 귀여운 존재, 지켜줘야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캐릭터가 고양이를 구하고, 고양이에게 선의를 배푸는 모습은 그 캐릭터의 욕망이 잘못된 것이어도 관객은 캐릭터에게 호감을 가진다. 르윈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의 여정 속에 고양이가 없다고 생각해보자. 르윈은 그저 꿈을 쫓는 이상주의자로 인지되었을 것이며, 그저 세상에 풍파에 찌들대로 찌든 주변의 흔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와 여정을 함께하고, 고양이를 걱정하며 밥을 근근히 챙겨주는 르윈의 모습은 관객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관객은 르윈과 여정을 함께하며 그의 감정에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며 영화가 전달하는 주제를 온몸으로 받을 준비를 마친다.


 고양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난 고양이가 르윈, 그리고 르윈의 꿈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붙이자면 르윈에게 꿈이란 그 정체성과도 같아서 르윈의 꿈은 곧 르윈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르윈에게 꿈이라는 것은 그에게 지니고 있기에는 버겁고 그렇다고 버리진 못하는 것이다. 르윈과 여정을 함께하는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뜻하지 않은 우연의 사건으로 함께하게된 고양이는 그의 차가운 현실에서 책임지기 어려운 존재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다. 그에게 꿈과 고양이는 애물단지다. 그래서 고양이의 서사는 르윈의 서사와 겹친다. 르윈은 여정을 함께하던 고양이를 최악의 상황이 되자 버리게 되는데, 이는 곧 르윈이 그의 꿈을 버릴 준비를 마쳤다는 걸 암시한다. 르윈은 고양이를 버린 이후 면접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포기하고 다시 선원이 되려고 한다. 르윈이 다시 자신의 꿈을 향해 도돌이표를 찍듯 다시 노력하기 시작하자, 교수의 집에 고양이는 스스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카페로 공연하러 가는 르윈의 눈에 비친 고양이의 여정을 다룬 영화 포스터. 포스터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됨’이라 적혀있다. 즉, 르윈의 여정은 1960년대 사회 어딘가에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르윈이 부르는 음악 또한 르윈의 처지를 잘 나타냈다. 가스등 카페에서 부르는 노래는 삶의 무상속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 르윈이 차가운 현실속에서 고통을 겪지만 결국 살아나가 꿈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르윈의 처지를 대변하는 노래다. 마지막 부분에 추가된 마이크와 함께 부르는 노래는 마이크에게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대 잘 지내요’라며 절규하듯 부르는 르윈의 모습은 현실에 치여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한 르윈의 감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면접을 보러간 르윈은 제인왕비의 산통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부른다. 이때 가사는 르윈의 꿈을 향해 가는 동안의 처절한 고통을 나타낸다. 가사 속 제인왕비는 산통을 며칠째 겪으며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왕비는 결국 아이를 낳지만 산통에 의해 죽고 만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고통을 겪는다는 데에서 제인왕비와 르윈은 공통점을 가지는데, 죽은 후에 목표를 이루는 제인왕비의 모습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삶의 굴레에서 허우적댈 것 같다는 르윈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화면 또한 면접관과 르윈 둘을 잡던 화면에서 서서히 르윈에게 클로즈업하며 르윈의 노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가사와 르윈을 바라보며 연민을 느끼던 관객은 노래가 끝나자마자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면접관의 냉혹한 말에 현실을 더 차갑게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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