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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준 Sep 22. 2022

차별의 포화 속 생명의 울부짖음

<칠드런 오브 맨> - 알폰소 쿠아론

 <칠드런 오브 맨>은 ‘2027년, 아기가 18년째 태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차별받는 계층인 푸지 출신인 키가 아기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영국인 테오가 정치적, 시대적 억압에 맞서 키와 휴먼 프로젝트라는 희망으로 여정을 같이 하는’이야기다. 영화 개봉 년도 기준 21년 뒤인 2027년 세상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아기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영국을 제외한 여러 국가가 전쟁으로 인해 삭막해졌다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 이 영화가 디스토피적인 세계관을 그린 영화 중 뛰어난 영화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있는 이유는 그 화면을 담는 독창적인 촬영술(미쟝센)과 적절히 녹아있는 신성, 그리고 시의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3가지 요소에 대해서 심도 있게 생각해보았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요소는 강박적으로 구성된 미쟝센과 그것을 담는 롱테이크 촬영이라는 촬영 컨셉이다. 롱테이크 촬영은 기본적으로 그 생생한 현장감. 즉, 사실적임을 추구하는 촬영법이다.


 영화의 1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만들어진 영화 문법은 우리가 컷과 컷 사이를 넘나들 때 그 시공간의 연속성에 대해서 의구심과 어색함을 가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컷과 컷이 넘어가는 그 과정은 잘못 넘어갈 경우 관객의 몰입을 깨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고, 약속된 극임을 관객에게 재인지 시키는 발화점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촬영 컨셉으로 잡고있는 롱테이크 촬영은 2027년이라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관객이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영화는 말 그대로 테오와 키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여정 속에서 영화는 계속 장소를 옮기고, 그 옮기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굉장히 역동적이다. 사회적 갈등과 정부를 향한 불신이 혼재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답게 작은 커피숍에서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무엇보다 문제적 개인인 키와 함께하게 된 테오의 앞에는 모든 이들이 위험으로 다가온다. 롱테이크 샷은 이런 역동적인 사건을 담아내기에 최적화 되어있다. 롱테이크 샷은 영화의 인물을 따라가고 그 상황 자체를 컷 없이 보여주어야 하기에 카메라의 움직임은 필연적이다. 즉, 정적인 화면이 나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롱테이크 샷에서 나오는 역동성은 테오와 키의 앞에 도사리는 위험을 강조하고 관객의 몰입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더해서, 롱테이크 촬영은 시간 체험의 미학이라고 불리운다. 컷과 컷 사이에 발생하는 시간의 비약이 없기에 영화는 관객의 리얼타임과 동화하여 영화가 가지는 체험의 기능을 강화한다. 이 점에서 롱테이크 촬영을 선택한 것은 관객이 영화에 느끼는 사실감을 높이는 동시에 이를 통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관객이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능했다.    


 그렇다면 그 미쟝센은 어떤 점이 뛰어났는가. 그 점도 롱테이크 샷과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다. 오프닝 시퀀스로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테오는 작은 커피숍에서 최연소 남자의 죽음을 속보로 전해 듣고 커피를 주문해 밖으로 나온다. 이때 커피를 받고 테오가 커피숍을 나와 커피숍이 폭탄에 의해 터지기까지의 장면은 모두 한 테이크다. 이 테이크 속에서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린다. 관객이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본다 가정했을 때, 관객의 눈은 작은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볼 때보다 더 많은 이동 거리를 가진다. 만약 롱테이크 샷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일 때, 혹은 다른 곳을 향해 카메라가 움직일 때 관객의 눈을 자연스럽게 이동시켜주는 요소가 없다면 관객의 눈은 방황하다 결국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다. 테오가 커피를 받아든 이후의 롱테이크 샷에서 관객의 눈은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 버스를 따라 자연스럽게 카메라의 움직임에 맞춰 돌아간다. 관객의 시선은 마지막에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 연인에게 멈추고 이 연인의 옆에서 폭탄이 터지며 평화로움이 깨져 관객에게 정서적 충격을 준다. 만약 자동차나 엑스트라가 관객의 눈이 가야할 방향을 향해 움직임을 하지 않았다면 관객의 시선은 연인에게 멈추지 않았을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롱테이크 속 이런 화면 하나하나의 구성 요소들은 철저히 계산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그 미쟝센이 강박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을 제외한 요소들이 눈에 띄고 의미를 가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화면이 광각렌즈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을 팔로우하는 샷이 많기에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인한 화면의 흔들림을 제한하고, 포커스를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광각렌즈의 사용이 불가피 했을 수 있지만 이런 요인 때문이 아니더라도 광각렌즈의 사용은 영화에 가져오는 효과가 컸다. 먼저, 광각렌즈의 넓은 화각과 깊은 심도는 주인공 주변의 요소들(이민자들이 갇혀있는 모습이나 벽에 쓰여있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들)을 효과적으로 담아내 관객에게 긴 설명없이 이 세계관을 이해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또, 광각렌즈는 원근감을 과장하는 특성이 있는데, 이 덕분에 인물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더욱 역동적으로 강화되어 줄리안이 총에 맞을 때의 자동차 씬이나 영화 후반부 전쟁 씬에서 관객이 더욱 역동적인 액션을 느낄 수 있었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눈물 모양 유리창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등장한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눈물 모양으로 깨진 창 속에 테오가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이 유리창 속 테오는 방금 말했던 장면 속에서 키가 위치한 벽 바깥에서 바라보는 테오의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국인이라는 사회 기득권 세력이지만 그 개인의 양심에 따라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인 푸지, 키를 보호하는 테오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무력감을 느껴 차마 끝까지 지킬 수 있다 확신할 수 없는 키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자 주인공의 감정이기에 영화를 대표하는 포스터에 나타났다 생각할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은 종교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는 영화다. 유독 아기의 탄생이 신성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영화의 뒤편에 종교적 색채가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어떤 부분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것이 영화에 어떤 숨은 뜻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주관적인 관점으로 해석해보겠다. 


 먼저,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그 종교적 색채가 가장 짙게 나타난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인 ‘테오’는 신 또는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그 여정을 함께하는 조산사인 미리엄의 이름은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를 가진다. 테오가 신. 즉, 기독교에서의 신을 의미한다면 마리아와 신이 함께 아이의 탄생을 위한다는 점에서 아이는 메시아, 즉 예수의 탄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근거를 더하는 것이 테오가 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했을 때, 그의 죽은 아들인 딜런의 이름을 키의 딸이 이어 받는 것 또한 신의 자식으로 여겨지는 예수라는 존재가 그 딸임을 암시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테오가 키에게 자식의 아비를 물었을 때 처녀라고 농담하는 것 또한 성경 속 마리아가 처녀인 상태로 아이를 밴 것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설정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영화는 그 종교적 상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기에 키는 농담을 정정하며 너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해서 그 친부를 모른다고 답한다. 물론 친부의 소재를 모른다는 점에서 예수와 공통점을 가지긴 한다. 이러한 해석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했을 때, 자연스래 드는 의문점은 ‘그렇다면 왜 키의 자식은 딸인가?’다. 예수라는 상징성을 지녔다면 아들인 것이 맞지 않나. 이 또한 감독의 의도가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예수와 신의 외형이 항상 백인 남성으로 묘사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항상 있어왔다. 실제로 이러한 묘사는 그 당시 백인 우월주의, 남성의 권력에 기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가진다. 그렇기에 감독은 의도적으로 제국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어투를 사용하는 흑인의 자식으로 또, 여성으로 이 생명을 설정한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을 가진 이름은 주연뿐 아니라 조연에도 포함된다. 먼저 테오의 정신적 지주이자 테오 일행에게 피난처가 되어주는 늙은 히피 제스퍼 또한 그 이름을 종교적으로 바라볼 경우 상징성이 있다. 제스퍼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벽옥’이 된다. 벽옥은 기독교에서 신의 모습,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하며 상징적으로는 기독교에서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는 새 예루살렘의 성의 모습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벽옥은 성스러운 요소임과 동시에 성역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테오가 제스퍼의 집에서 안식하고, 테오 일행이 제스퍼의 집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누리는 것은 제스퍼와 그가 머무는 공간이 성역으로서 상징을 가지고 기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자면 벽옥은 녹색의 보석인데, 제스퍼의 집에 녹색 대마가 있는 것과 그의 집이 녹색의 숲에 둘러싸여있는 것은 벽옥의 이미지를 가져왔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테오 일행을 쫓는 피쉬단 일당은 12사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테오 일행이 줄리안이 죽고 괴한들에게 쫓겨 찾아간 피쉬단의 근거지에서 그들은 키의 다음 처사에 대해서 간부회의를 연다. 공교롭게도 간부회의에 참가한 인원은 미리엄,키,테오를 제외하면 12명이다. 굳이 그 좁은 방에 12명이라는 간부를 넣은 것은 분명히 감독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리더이자 간부 회의를 진행하는 흑인 ‘루크’는 그 이름에서 ‘누가’를 의미한다. 누가는 기독교에 대해 모르더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누가복음의 저자다. 누가는 12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발행한 저자이기도 한데,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인물이라는 데에서 영화 속에서 루크가 그들의 리더를 맡고 있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즉, 루크는 12사도에 포함되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이 있어야 이들이 12사도라는 것이 말이 될텐데, 그 한 명은 어디 있는가. 바로 뒤늦게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하는 사이먼이 그 한 명이다. 사이먼은 사도 시몬을 다르게 부르는 말이다. 사도 시몬은 기록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로마 제국을 상대로 테러, 암살을 통해 무력으로 독립을 지지한 열심당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먼의 테오를 집요하게 노리는 다혈질적인 성격이나 무력에 거리낌 없는 모습이 사도 시몬을 반영하는 사이먼의 캐릭터성이 아니었을까. 뿐만 아니라 그 간부 회의에 총을 들고 뒤편에 앉아있던 사람은 테오를 감시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인데 그 이름은 12사도에도 있는 이름인 토마스다. 사도 토마스는 예수가 부활했을 때 그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보고 나서 그의 부활을 믿은 사람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토마스는 의심 많은 사람을 상징한다. 토마스가 테오를 의심하며 감시하는 것 또한 사도 토마스의 캐릭터성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가톨릭의 색채가 묻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위의 가톨릭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틀렸을 수도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에 그 아이의 탄생이 메시아의 탄생을 의미하고, 영화 전반에 가톨릭의 향이 깔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위와 같은 가톨릭적인 상징들을 배치함으로써 생명의 탄생에 대한 그 신성함, 거룩함을 더하고 어느정도 비판의 여지가 있는 작위성을 종교를 통해 운명적인 상황으로 변모시켜 관객에게 거부감 없이 전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칠드런 오브 맨>이 마스터피스로 불리는 이유는 미래를 예지한 시의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문제, 저출산, 고령화 사회, 기득권층의 낙관적 미래 인식, 하층계급 끼리의 진흙탕 싸움은 영화가 나온 시점인 06년도부터 지금 22년도까지 꾸준히 문제가 되고, 심화되고 있는 문제다. 어쩌면 영화가 배경으로 다루는 27년도에서 이 문제가 지속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쟁점은 바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문제다. 영화 속 배경은 세계 각국이 종교적 갈등, 내전 등으로 모두 피폐해졌고 유일하게 정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영국이라는 설정이다. 이 때문에 각국에서 영국으로 오는 이민자들은 현재 가장 영국에서 가장 큰 문제이고 이민자들은 걸리는 즉시 잡혀 열악한 수용소로 보내지는 등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다. 영화에서 시사하는 이민자 문제는 비단 서양권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만 해도 그렇다. 한국은 인구의 대부분이 한민족으로 이루어진 이민자에게 굉장히 폐쇄적인 나라다. 그 이유에는 한국 사회에 팽배한 이민자에 대한 편견이 바탕이 되는데, 이런 이민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은 영화 속 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굉장히 유사하다. 영화 속 이민자들은 ‘푸지’라는 사회의 이등 시민이 되어 잠재적 테러 범죄자로 취급받으며 아무 죄 없이 무법지대인 수용소에 감금당한다. 즉, 이민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박탈 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 또한 그러하다. 이민자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 받으며, 이민자들의 수용을 반대할 때 나오는 근거 또한 항상 그 범죄율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그 이민자들의 범죄는 통계적으로 내국인들보다 2배는 적고, 그 대상 또한 내국인보다 외국인 대상이 많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색안경이 이민자들의 범죄만을 대상으로 그 심각성을 짙게 바라본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이민자들이 만들어내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한국 같은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소통의 문제, 문화의 차이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민자들을 향해 선의의 눈길을 줘야하는 것은 단순히 도의적인 관점에서 뿐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로 도시화 진행 과정에서 많은 인구가 농촌에서 유출되었다. 저조한 출산율로 고령화 사회를 향해 가는 현재, 농촌에서는 고령화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두드러진다. 이런 농촌, 특정 지역들에서는 현재 이민자들이 없으면 생산활동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으로 미루어보아, 미래에는 이런 생산인구 한명 한명이 중요한 실정에 다다를 수 있다. 국익의 관점으로도 이민자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차별의 대상이 아닌 백인 남성 테오가 푸지인 흑인 여성 키를 위해 희생하는 설정은 분명 서구 선진국 관객들에게 이민자 문제에 대해, 차별에 대해 깊은 감명을 줬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한국의 상황을 봤을 때 테오의 행동은 동아시아의 폐쇄적인 선진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영화 <미나리> 속 한국인 이민자 가족을 생각하며 역지사지의 논리로 이민자들이 코리아 드림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은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낸 장면은 테오가 자신의 사촌을 만나러 간 장면이다. 테오의 사촌은 박물관 관장으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고,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차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사촌은 그 돈으로 예술작품들을 모으며 현실의 문제를 벗어나 쾌락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 테오는 밖에서 목도한 사회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한 사촌의 모습에 어차피 백년 후에는 아무도 이런 예술작품을 보지 않을텐데 왜 모으냐고 질문한다. 이 질문에 사촌은 ‘I just don’t think about it.‘ 이라 답하며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기득권층의 낙관적이고 느슨한 문제 인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으며 노동계급에 고통을 주고 있는데, 이런 비판점은 사촌과 테오가 대화 나눌 때 배경에 보이는 예술작품을 통해 나타난다. 테오와 사촌이 평화롭게 식사하고 있는 장소의 배경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란 도중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담은  림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함으로서 그 비극성을 담고 있다. 이런 그림을 단순히 수집품으로 취급하며 그 앞에서 평화로운 식사를 하는 것은 밖의 비극적인 상황을 창밖의 풍경으로만 바라보는 기득권층의 인식을 담고 있다. 언젠가 이 창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사촌과 테오가 창문 쪽으로 이동하여 대화할 때 창밖에는 이상한 돼지풍선이 떠다니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사실 창 밖의 공장과 돼지 풍선은 영국의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열 번째 정규앨범 ’animals‘의 커버 속 풍경과 같다. 이 ’animals‘라는 앨범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앨범으로, <동물 농장>의 돼지가 그렇듯 돼지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회 기득권층을 상징한다. 영국의 몰락해가는 현실을 비판하는 이 ’animals’ 앨범의 표지가 창문 밖에 나오는 것은 영화 속 영국이 현재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돼지 풍선이 강조되어 사촌의 옆에 위치하는 것은 사촌이 <동물농장> 속 돼지와 다를바가 없는 존재라고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런 해석으로 봤을 때, 사촌의 옆에 개가 있는 것 또한 <동물 농장>과 관련이 있다. <동물 농장> 속 개는 돼지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돼지의 권력을 유지하는 무력의 역할을 해낸다. 테오가 사촌에게 방문 했을 때 다비드 상 아래에서 입구를 지키는 커다란 개 두 마리에게 테오가 위험을 느끼고 멈칫하는 것 또한 권력계급과의 거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공익의 대립 또한 영화에서 잘 나타나있는 부분이다. 키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영화에서 인류의 운명을 맞바꿀 수 있을 정도의 중요한 사건이다. 인류 전체의 이익, 대의를 위해서는 테오가 간부회의 때 말했듯 키의 임신 사실을 공표하고 정부의 보호 속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계층이 모인 피시단의 간부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정부에게 아이를 맡길 경우 아이의 출신이 바뀌어버릴 것이라고 한다. 피쉬단은 결국 푸지 출신 키가 현재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푸지를 향한 차별을 멈추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길 원했던 것이다. 이들에게 키의 존재는 결국 자신들을 가로막는 차별의 문을 열 말 그대로 키(key)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공익은 키가 자신들의 비호 속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다. 


 이런 공익과 공익의 대립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가 이들에게 그어놓은 선에 있다. 그렇기에 피쉬단이 아무리 키를 도구로써 사용하고 인류의 대의를 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공익의 대립은 현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가장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우리 사회의 공익의 대립은 ‘장애인 이동권 시위’다. 분명 소외 계층인 장애인들에게 공익은 그 이동권이 보장되고 사회적 시스템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비장애인들에게 이들의 시위는 출근길을 막는, 즉 공익을 저해하는 불편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위가 한편에서 정당성을 가지는데, 이런 시위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대다수의 비장애인들이 그 이동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애인 이동권 시위나, 사회의 여러 공익의 대립, 영화에서 나타나는 대립은 사회가 소수자들에게 그어놓은 선을 지우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나타나지 않을 갈등이었을 수 있다. 영화는 이런 사회 속 공익의 대립이라는 문제를 소수자와 정부의 대립으로 그려넣음으로써 관객에게 소외계층에게 그어져있는 선에 대해 환기하도록 한다.     


 영화에서 이 모든 시의성을 가지는 대립이 멈추는 때가 오는데, 그때가 바로 아기를 안고 포화속을 지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건물 안에 있는 푸지들은 아기를 발견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잊은 채 생명에 대해 경외감을 표한다. 건물에 진입하던 군인들 또한 아기를 발견하고는 사격을 중지하고 생명에 대해 경외감을 표한다. 영화 속에서 대립이 멈춘 시점은 키와 테오가 아기를 안고 건물 밖으로 나갈때까지 뿐이다. 이 대립의 중지와 생명에 대해 경외감을 표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는 위에 서술했듯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관객의 경우 ‘그래서 왜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생명의 탄생과 그 경이로움’으로 대답한다. 우리는 모두 탄생의 경이 속에서 세상에 첫 숨을 내쉬었다. 이는 하층계급이든, 이민자든, 기득권층이든 모두 같다. 모두 같은 인간이고 생명의 존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이러한 존재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전하고 있다. 차별받는 그대도, 차별하는 그대도 모두 같은 인간이고 생명이라고 영화는 호소하고 그 차별을 멈추라고 외친다. 영화의 제목 또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의 아이들’. 이민자의 자식이나 기득권의 자식이 아니다. 모두 같은 사람의 아이들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Shantih Shantih Shantih’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해석하면 ‘평화, 평화, 평화’다. 서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평화를 찾자. 영화가 전달하는 바다.     


 여담으로 영화에서 가톨릭의 색채와 이름의 상징성에 대해 연구하며 엔딩크레딧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유심히 보던 와중, 그 엔딩크레딧에 제작사의 상호가 나오기 전 ‘Para annalisa, Bu y Olmo’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해석하면 ‘Annalisa, Bu, Olmo를 위해’로 해석되는데 각각 쿠아론 감독의 아내, 아들, 딸의 이름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로마>에서는 그의 어릴적 돌봐준 가정부에게 바친다는 문구를 넣고, <그래비티>에서는 ‘어머니께 감사하며’라는 문구를, <이 투 마마>에서도 누군가를 위한다는 코멘트를 달아놓은 것을 보아 쿠아론 감독에게 각 영화는 누군가에게 바치는 의미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칠드런 오브 맨을 왜 그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바치는 것일까. 그것은 쿠아론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와 같지 않을까 추측된다. <칠드런 오브 맨>은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다. 그리고 원작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또한 생명의 경이에 대한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어쩌면 자신의 자식을 낳을 때 느꼈던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이로움과 평화를 이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너희가 탄생할 때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단다.’하고 바치는 의미라면 어느정도 추측이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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