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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밧드 Jun 26. 2024

바벨탑 이야기

노아의 방주 사건 후,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살았다. 그러다가 "아, 우리 동방으로 이사 갈까?" 하면서 시날 평지라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들은 회의 끝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름 좀 알려보자! 흩어지지 않게 탑 하나 크게 세워보자!" 야심찬 도전. ‘세계 최고 높이’를 달성해서 기네스북에 올릴 생각이었던가 보다.


하지만 전지전능한 야훼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탑 쌓는 걸 보고 깜짝 내려오더니 말한다. "얘들이 무리 하나에다가 말도 다 통하니, 이거 나중에 더 큰 일을 벌이겠네. 우리 가서 언어 좀 섞어놓자, 못 알아듣게!" 이렇게 야훼의 첫 심통 발동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야훼는 그들을 사방팔방으로 흩어놓고, 언어도 죄다 뒤죽박죽 섞어버렸다. 그들은 당연히 탑 쌓기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밖에. "이거 뭐라는 거야?" "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냐고?" 서로 말이 안 통하니 그냥 삐져서 각자 집에 가버렸다고. 이게 바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다.


이 바벨탑 이야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나는 <창세기> 저자가 "어떡하지, 언어가 왜 이렇게 많지?" 하고 궁리하다가 끼워 넣은 것 같다고 본다. 왜냐면 홍수 때 노아 가족 말고는 다 죽었다며! 그러면 언어가 하나여야 맞잖아. 근데 현실은 여러 민족이 여러 언어를 쓰고 있으니, "이거 어쩌지?" 하다가 "그래, 바벨탑 사건 하나 만들어 넣자" 한 것 같다. 이 이야기가 이후에 딱히 영향도 없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뭐, 그랬대~ 하고 넘어가는 느낌?


기독교의 한 지도자가 바벨탑 사건을 해석한 걸 보니, 한마디로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을 상징해!"라고 하더라고. 탑 쌓는 걸 미신처럼 믿고, 오만하게 굴었다는 것. 근데 또 문제는, 그들이 다 한 언어로만 소통하니까, 비판할 사람도 없고 획일적이어서 문제였단다. 그래서 야훼가 언어를 갈라놓고, 다양한 문화를 주려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뭐, 오만한 인간을 심판하면서 다양성까지 챙겨주는 야훼란다.


그런데 말이야, 야훼 한 분만 섬기게 하는 기독교의 획일성과 편협함을 타파하고 여러 신을 섬기게 하는 건 안 되나? 그럼 유일신 사상의 오만과 배타주의도 좀 없어질텐데 말이다. 그냥 내 생각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2천 년 동안 연구하면서 정말 기상천외한 해석들을 많이도 해놨더라고. 아무리 납득이 안 되는 일도 해석할 방법은 있는 법. 기독교지도자들의 임무는 야훼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정당화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이 바벨탑 이야기를 들으면, 갑자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생각난다. 프랑스 사람들이 모국어를 독일에 뺏기는 슬픔을 다룬 이야기다. 이 작품을 한국인만큼 이해할 민족이 또 있을까?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한글도 빼앗기고 이름까지 바꿔야 했잖은가. 그런 아픔이 떠오르는 이야기.


근데 바벨탑 이야기에서 인류의 다양성을 주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고? 이건 좀 이상하다. 싸움 대부분은 소통의 부재에서 시작되는데, 소통이 안 되면 타협도 못 하고 싸우기만 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소통을 방해하면 싸움이 안 일어나나? 어쩌면, 층간 소음 문제로 싸움 나는 아파트에서도 서로 언어가 달랐다면 오히려 싸움이 안 났을지도 모른다. 궤변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성부, 성자, 성령도 계속 한 언어만 쓰니까 이게 또 폐쇄적이고 획일적이겠다? 그래서 그들 언어도 좀 혼잡하게 해서 다양성을 부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신들 사이의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냐만은, 오히려 인간들이 신의 뜻을 몰라 갈팡질팡할 것 같다. 번역기를 사용하면 된다고? 에이!


결론은, 바벨탑 이야기가 그냥 <창세기> 저자의 끼워 넣기가 아니라면, 그건 야훼가 인류에게 행한 폭력 사건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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