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엄마의 두 눈가에 주름살이 짙어졌다. 술 묹베로 늘 싸웠던 아버지와 말 안 듣던 두 어린 아들 때문에 엄마의 젊은 날을 잃어버렸다. 제 삶은 뒷전에 두고 못난 아들 셋에 인생의 절반을 바치느라 녹초가 된 우리 엄마 ….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외할머니가 엄마 대학을 보내주지 않아서 설움을 겪었다. 엄마의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엄마는 누구보다도 대학생활에 셀렜을 것이다. 나름의 낭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정한 외할머니는 “여자가 무슨!! 시집갈 생각을 해야지”라면서 엄마가 대학 다니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엄마의 첫 꿈은 무너졌다, 나는 엄마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너무 엄마가 불쌍했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외할머니라면 학기마다 제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꽂아줄 수 있을 정도로 엄마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엄마가 환갑 즈음 되었을 때 내가 돈 벌어서 엄마를 야간대학에 등록시켜 줄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때부터 엄마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외할머니는 엄마의 20대 내내 엄마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며 들들볶았다. 결혼 언제하느냐고. 그러다가 아버지의 적극적인 구애로 엄마는 아빠를 만났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어떻게 남자가 깡마를 수 있냐면서….
그럼에도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엄마 입장에서 외할머니의 치맛바람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유로운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술이 문제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들어와 난리를 칠 때마다 집안은 쑥대밭으로 변했다. 부모님 사이에 위기도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무너졌다. 절망을 거듭했다.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커져 갔다.
엄마가 형을 낳을 때도 아버지는 엄마 곁에 있지 않고 회식하러 다니는 매정한 아버지이자, 엄마에게는 무정한 남편이었다. 물론 내가 태어났을 때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십 몇 년뒤 아버지는 술과 점차 멀어져서 엄마와의 불화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사춘기가 된 나와 형이 문제였다. 나는 돈을 귀한 줄 모르고 막 써댔고, 형은 엄마한테 반항한 것 때문에 몇 시간 씩 싸워댔다. 그때마다 엄마는 녹초가 되어갔다. 특히 엄마는 나를 키우느라 그 젊은 날을 버려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당시 학교에 적응하지 못 하고 말썽만 피워대서 엄마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도 어울리지도 못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담임이 나를 특수반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다른 아줌마였다면 현실을 받아들였겠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죽을 힘 대해 나를 헌신적으로 받아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받아쓰기 시험에서 매번 100점을 받았다. 그러자 담임은 “와~ 그래도 공부는 잘하네!”라고 했다. 그 후에도 엄마는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나를 교육하셨다.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중학교 때는 일반계 고등학교로 보내기 위해, 또 고등학교 때는 대학을 보내기 위해 입에 가시가 돋을 때까지 나를 교육하셨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는 내가 스스로 공부해보겠다고 했고 결국 나는 명문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때 내가 초등학생처럼 엄마의 말을 따랐더라면 부산대는 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은혜를 모르고 공부가 단지 하기 싫다는 이유로 나무만 본 결과 엄마의 속을 많이 썩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우셨다. 그리고 주름살이 짙어졋다. 지금은 그 모습을 다시 회상할 때마다 고생만 하신 엄마를 이렇게 속을 썩여서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도 미어졌다.
이는 내가 한창 질풍노도 사춘기일 때 엄마한테 했던 몰상식했던 행동들을 하고 난 뒤에도 똑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뿐 또 되풀이한다.
이제는 그 악순환을 끊어내야 했다. 더 이상 엄마를 고생시킬 수 없다. 엄마가 고생한 만큼 이제 내가 엄마의 짐이 되는 것이 아닌 엄마의 힘이 되어주어야 했다. 엄마가 나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이제는 내가 엄마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했다. 이재는 엄마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엄마는 이때까지 고생만 하셨다. 이제 엄마가 해보고 싶었던 취미, 배우고 싶었던 것, 엄마의 자기계발을 자식인 내가 해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