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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기 Mar 01. 2023

이 작은 그림 하나가 떠오른 것은

<40일간의 글쓰기>

영국에서 1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먼지가 두껍게 쌓인 포트폴리오 가방을 13년 만에 열어 보았다. 내 마음이 살아나고 내 안에 새로운 세포들이 만들어져 가기 시작할 무렵, 문득 이 작은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는 많이 변했는데 내가 그린 그림들은 그대로 있어주었다. 내가 이런 색을 썼었나? 내가 이런 색도 썼구나! 하는 그림도 있었고, 꽤 집요하게 그린 그림도 있었다. 그 수많은 그림들 속에서 이 작은 그림 하나가 떠오른 것은, 그림뿐만 아니라 그릴 때의 기분까지 내 안에 또렷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천 대공원에 있는 동물원에서 단풍이 곱게 물들었던 어느 가을날 그린 그림이다. 아프리카 영양들은 내가 자기들을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움직였다. 저절로 크로키가 될 수밖에 없었다. 5분도 안 걸려 단번에 그린 그림이지만 형태도 정확하고 선에서는 힘과 자유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순간, 내가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다 보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미대를 가겠다고, 작은 옥탑방에 반은 차지하던 이젤을 펼쳐놓고 혼자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내가 정말 잘하고 싶은 것은 드로잉이지만 나는 그쪽으로 아주 타고난 사람은 아니어서 파인 아트보다는 디자인이 더 잘 맞을 거라 선을 그어놓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내가 그렸던 그림들을 지금의 마음으로 다시 보니, 그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이 정도의 재능만 있어도 나머지는 내가 얼마나 끝까지 그리느냐에 달려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는 이만큼의 선도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서 처음엔 자주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그려보고 싶다.


자려고 불을 끄면 내가 방금 전까지 그린 그림을   없어서 빨리 아침이 오길 바랐고, 가끔은 내가 그린 그림이 너무 보고 싶어서 집에 일찍 들어왔던,  귀엽고 순수했던 시간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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