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글쓰기>
영국에서 1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먼지가 두껍게 쌓인 포트폴리오 가방을 13년 만에 열어 보았다. 내 마음이 살아나고 내 안에 새로운 세포들이 만들어져 가기 시작할 무렵, 문득 이 작은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는 많이 변했는데 내가 그린 그림들은 그대로 있어주었다. 내가 이런 색을 썼었나? 내가 이런 색도 썼구나! 하는 그림도 있었고, 꽤 집요하게 그린 그림도 있었다. 그 수많은 그림들 속에서 이 작은 그림 하나가 떠오른 것은, 그림뿐만 아니라 그릴 때의 기분까지 내 안에 또렷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천 대공원에 있는 동물원에서 단풍이 곱게 물들었던 어느 가을날 그린 그림이다. 아프리카 영양들은 내가 자기들을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움직였다. 저절로 크로키가 될 수밖에 없었다. 5분도 안 걸려 단번에 그린 그림이지만 형태도 정확하고 선에서는 힘과 자유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순간, 내가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다 보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미대를 가겠다고, 작은 옥탑방에 반은 차지하던 이젤을 펼쳐놓고 혼자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내가 정말 잘하고 싶은 것은 드로잉이지만 나는 그쪽으로 아주 타고난 사람은 아니어서 파인 아트보다는 디자인이 더 잘 맞을 거라 선을 그어놓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내가 그렸던 그림들을 지금의 마음으로 다시 보니, 그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이 정도의 재능만 있어도 나머지는 내가 얼마나 끝까지 그리느냐에 달려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는 이만큼의 선도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서 처음엔 자주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그려보고 싶다.
자려고 불을 끄면 내가 방금 전까지 그린 그림을 볼 수 없어서 빨리 아침이 오길 바랐고, 가끔은 내가 그린 그림이 너무 보고 싶어서 집에 일찍 들어왔던, 그 귀엽고 순수했던 시간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