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천사> 유타 바우어 글/그림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다. 가벼운 접촉 사고를 당해 병원을 찾았다가 급성 암이 발병했음을 발견했는데, 그로부터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럽지 않은 죽음이란 없지만, 아빠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빠를 보내드릴 때 비로소 사람이 정말 죽는다는 걸 실감했다. 죽음이란 살아있을 때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부모와의 이별이 언젠가 찾아오리란 생각쯤으로는 아무런 대비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아빠가 돌아가신 후 1년쯤 지난 여름 밤이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산책길로 들어서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그 바로 앞에 중고 가구점이 있다. 가게 앞에는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며 헌 가구들이 늘 자리를 잡고 있다. 보도를 건너려고 가구점을 지나치는데, 노인 한 분이 의자에 앉아 계셨다. 그런데 그 실루엣이 돌아가신 아빠랑 너무 닮은 것이 아닌가. 검은색 야구 모자, 한 여름에도 고집하던 카라 티셔츠, 운동화 차림도 그렇거니와 몸의 풍채며 한쪽 손을 허리에 얹고 앉아있는 자세며, 여하튼 아빠랑 너무 비슷했다. 마냥 쳐다보기가 뭣해서 주저하며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길 건너에서도 한참을 바라보고, 발걸음을 뗀 후에도 몇 번이나 가구점을 돌아봤다.
얼마 지나 친정에 갔다가 엄마에게 그 얘기를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빠, 하고 부르면서 달려갈 만큼 닮았더라."
그랬더니 엄마도 언젠가 비슷한 일이 있었다며 운을 뗐다. 볼 일이 있어 대문을 나서는데,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올라오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빠였다는 것이다. 검은색 야구모자에 안경, 검은 책 점퍼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딱 아빠였단다. 순간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잊고, 저 양반이 왜 벌써 들어오시냐, 생각했단다. 나는 눈물이 나는 걸 참느라 혼났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들어서는 아빠가 그려져서, 그런 아빠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상상을 하게 되었다.
아빠가 계시는 천국은 생각보다 멀지 않고, 아주 가끔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외출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엄마랑 나처럼 간혹 알아볼 수도 있지만, 대개는 못 알아보는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슬프지만 행복했다.
나는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하며, 그 노인이 또 보이지 않을까 찾곤 했다. 그 후로는 그 노인을 다시 보지 못했는데, 의자에 앉아있던 실루엣은 아직도 선명하다.
도서관 그림책 서가에서 우연히 만난 그림책 <할아버지의 천사>.
유타 바우어는 <고함쟁이 엄마>라는 그림책으로 만나본 작가인데,
('고함쟁이 엄마'도 무지 좋아하는 책!)
그림책 서가에서 이 책을 본 순간 느낌이 왔다.
아, 이 책!
한참을 보고 또 봤다.
유타 바우어의 유쾌하고 따뜻한 그림, 짧고 담담한 문장, 그림책의 최고의 미덕인 상상력이 담긴
정말 멋진 그림책!
어쩜 이토록 상실의 슬픔을 따뜻하게 어루만질까?
볼 때마다 그림책을 가슴에 꼭 안고 매만지고 싶어 진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손자가 놀러 올 때마다 당신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손자를 보며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생각해보면 난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았단다."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에도, 어른이 되어 삶이 버거울 때도, 전쟁이 나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온갖 일을 전전하다 포기한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듯, 담담히 지난날을 회상한다.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고, 손자를 맞이했던 모든 삶이 정말 멋진 인생이었노라고.
"가끔은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적도 있었지만, 난 정말 운이 좋았단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죽음을 마주한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손자에게 전하는 말이라니,
얼마나 얼마나 진심이 꼭꼭 담겨있을까.
할아버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는 피곤한 듯 스르르 눈을 감고, 손자는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할아버지를 지켜주던 수호천사는 할아버지를 그렇게 편안하게 재우고,
밖으로 나간 손자를 뒤따른다.
환하고, 따뜻하고, 멋진 날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돌아보면 멋진 인생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자 죽음인가!
아빠의 마지막이 생각난다.
아빠는 병명도, 남겨진 시간도 아셨고,
치료도 단호히 거부할 만큼 또렷한 의식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평생을 아빠와 가족을 위해 헌신한 엄마에게,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아빠가 남긴 말은 '미안하다'였다.
짧은 그 한 마디에 울고 또 울었다.
사랑한다, 고맙다,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아빠,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나도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는데,
아주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아빠도 분명 아셨겠지.
그림책이 주는 감동은 종교나 가치관, 인종이나 성별, 나이, 학력.. 따위,
사람들을 가름 짓는 것들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이 그림책 역시 수호천사를 믿는지, 아닌지에 따라 감동이 달라지는 것을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을 만난 후, 그림책 낭독회에서 회원들과 함께 낭독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이 책으로 위로받고,
따뜻한 감동을 마음 가득 담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