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힘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by 올리브나무

글작가와 그림작가


어린이책은 그림책은 말할 것도 없고, 동화나 논픽션에도 반드시 그림이 들어간다. 글작가로 일하면서도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큰 이유이다. 내 글에 어울릴만한 그림작가를 추천하기도 하고, 그림에 오류가 없는지 감수하고, 글과 그림이 따로 논다 싶을 때는 의견도 낸다. 특히 논픽션 글에 들어가는 그림은 글작가의 감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언젠가는 그림 작업을 완전히 새로 한 적도 있었는데, 고려시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옷이 시대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논픽션 원고를 쓸 때는 거의 그림 자리를 지정해주고, 그림작가의 품을 덜어주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링크하고 참고자료 리스트를 덧붙인다.


내 책에 그림을 그려준 여러 그림작가들이 있지만, 실제로 만난 본 작가들은 손에 꼽는다. 작가로 일하기 전에는 글작가, 그림작가가 함께 논의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있을 거라고 생갹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원고를 넘기면 디자이너가 책을 디자인한 후 그림작가에게 그림을 발주한다.

편집자에 따라서 스케치 단계에서 글작가에게 감수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엔 그마저도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율은 편집자의 몫이다.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만나는 과정까지 더해지면 일 진행이 더뎌지기는 할 테지만, 아쉬면 면이 있다. 어린이책은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함께 완성하는 작품인데 말이다.


어린이책은 글이 완성되고 그림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글작가가 원고를 빨리 쓴다고 해도 책은 한참 후에나 나온다. 대부분 그림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지연된다. 그림작가와 얽힌 몇 번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원고를 넘긴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출간이 안되어 출판사에 항의하니 그림작가가 잠수를 탔다고 했다. 그런 경우는 흔했다. 한 번은 결국 그림작가를 교체하기로 했는데, 계약을 해지하자고 통보했더니 그제야 그림 한 컷을 보내왔다. 그러더니 또 잠수. 결국 신입 편집자가 매일 그림 작가 집에 가서 그림 한 컷씩을 받아냈다. 그렇게 어렵사리 책이 나왔다. 너무 화가 나서 그 작가의 블로그에 들어가 봤더니, 고양이랑 잘 놀고 잘 먹고 산다는 글은 매일 올라왔다.


보지 않고 그릴 수는 없는 것일까?


한 번은 박물관에서 일어나는 판타지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림이 발주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 편집장에게 연락이 왔다. 그림작가가 박물관 수장고를 실제로 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수장고를 볼 수 있게 섭외를 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박물관 수장고의 유물들이 살아나는 대목이 있었는데, 원고를 쓰면서 수장고를 보지 못했을 그림 작가를 위해 다양한 수장고 이미지를 원고에 붙여둔 터였다.

"이미지와 실제 수장고가 다르지 않아요. 이미지 자료를 토대로 그림 작가님이 상상력을 발휘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전달했는데도 워낙 완강해요. 그 작가는 안 본 건 못 그리는 스타일이래요. 작가님이 힘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

황당하지 그지없었다. 내가 그림 작가를 위해서 수장고 섭외까지 해야 하나? 편집장은 내가 전직 박물관 학예사였으니,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냐고 했다. 박물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조차도 학예사가 아니면 수장고는 접근 불가이다. 학예사도 몇 중의 보안을 뚫어야 수장고에 진입할 수 있다. 그런데 박물관을 떠나 직업까지 바꾼 내가 무슨 수로 수장고를 섭외하나?

자료를 더 주겠다, 실제로 봐도 별 거 없다, 수장고 그림이 주가 아닌데 그렇게 까지 할 것 없다, 등등 이러저러한 말들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반드시 수장고를 봐야겠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완전 생떼였다. 그렇게 간절하면 자료조사 차원에서 혼자 해결하던가, 왜 글작가를 괴롭히지?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을 수장고에 들여보낼만한 힘이 없다고요!

그런 연락이 여러 번 오가니 피곤했다. 그림 작가 바꾸면 안 되나요,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작가님이 힘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와서 그림 작가 다시 섭외하려면 너무 늦어져요. 작가님 주변에 학예사들 많으시잖아요."

그림 작가도 그렇고, 편집장도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떼쓴다고 될 일이 따로 있지.

"작가님, 주변에 연락이라도 좀 해 봐주시면 안 될까요?"

우이쒸. 정말 욕 나올 지경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을 그리는지 보자. 못 그리기만 해 봐라.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말을 하면서도, 이 무슨 황당한 부탁인가 싶어서 입이 제대로 안 떨어졌다. 그게 안 된다는 건 박물관에 몸담았던 내가 제일 잘 알지 않나?

하, 진짜!

내가 본다는 것도 아니고, 제삼자가 방문하다는 말에 다들 난색을 표했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아카이브에 근무하는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공공박물관보다는 수장고 접근이 쉽지 않을까 싶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원래는 안 되는 거 알지? 너랑 함께 오면 잠깐은 보게 해 줄게. 윗선에는 보고 못하지."

며칠 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아카이브는 보통 박물관이랑 수장고가 많이 달라서 내가 아는 박물관에 부탁했어. 나 믿고 보여주는 거라서, 나랑 같이 가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 없이 30분 이내로."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림작가는 그렇게 여러 사람의 수고를 담보로 수장고를 보고야 말았는데, 한참 후에 작가의 스케치를 받아보고 난 너무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야!!!!!!!!!

진열장 하나를 떨렁 그린 게 다였다. 전체적인 그림체가 별로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상상력도 없고, 고민의 흔적이 1도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 수장고를 실제로 봐야 한다고 떼를 썼던 것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유별나게 구는 그림작가이니 그림이 달라도 뭐가 다르겠지 싶었는데, 기대가 커서 실망이 컸던 게 아니라, 그냥 실망 그 자체였다.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해를 못 하는 것일까? 정말 봐야만 작동되는 그림 작가만의 메커니즘이 있는 거야? 내가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게 뭐야 대체!

실망을 넘어 화가 치밀었다. 편집장도 실망하는 눈치였는데,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게 너무나 맘에 안 드는 책이 나왔다. 나는 아직도 그 책에 그다지 정이 안 간다. 어린이책에서 그림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끼게 된 계기였다.


상상력은 힘이 세다


글에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작가들이 부럽다. 바로 그림책 작가들. 멋지고 존경스럽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어."

"하면 되지, 아직도 안 늦었어."

친구들이 종종 그렇게 말해준다.

그럼 기분이 잠시 좋아졌다가, 이내 생각한다.

"에효, 글이나 잘 쓰자."

작가란 무엇인가?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작가는 조금 달라야 한다. 본 것이 아니어도, 마치 본 것처럼 상상 속의 세계를 실감 나게 그려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상상력은 작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특히 어린이책의 세계에서 상상력은 힘이 세다. 그것이 어린이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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