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의 적응 기간을 마치니, 미국에서 학교생활도 훨씬 수월해졌다. 우선 2~3개월쯤 지나니 귀가 트이는 것이 느껴졌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건 선생님들이 또박또박 설명해 주시는 편이어서 첫날부터 큰 문제는 없었다. 가장 크게 체감되었던 변화는 같이 호스트 가족과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처음엔 아는 단어들만 쪼개져서 들렸다면, 이제는 문장이 들리고 완벽하진 않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어진 것이었다.
물론 영어 수업에서 소설을 읽거나 독후감을 쓸 때는 큰 불편함을 느꼈다. 특히 영어 수업 때 읽어야 했던 에드거 앨런 포의 <아몬틸라도의 술통>과 같은 고전 소설들은 한 문단에서 아는 단어보다 모르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올 때도 있었다.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읽으려 최대한 노력했지만, 속도가 나오지 않아 때론 한국의 검색엔진을 이용하여 이해가 안 됐던 부분들을 보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권장하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 미국에 왔을 때보단 분명한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나 스스로 영어 실력이 향상되는 게 느껴지니 학교 공부가 재밌게 느껴졌고 그만큼 더 노력했던 것 같다. 또한 한국에서는 학교와 학원을 병행하다 보니 집중력이 분산되는 느낌이었다면, 미국에선 온전히 학교 수업에만 집중하면 되었고, 이는 좋은 성적으로 돌아왔다. 물론, 요새는 미국 고등학생들도 학원에 다니기도 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 학생들과 같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때도 많지만,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9학년 (한국 기준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겐 크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성적도 괜찮고, 학업 스트레스도 덜하고, 미국 생활도 만족스러우니 나는 이 유학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새해를 맞이하고 한국 입국 날이 대략 5~6개월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나는 부모님과 교환학생 이후의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정한 원래의 계획은 교환학생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 1학년으로 복귀 혹은 1년을 유급하여 중학교 3학년 2학기부터 다시 다니는 것이었으나, 나는 미국에 남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이미 호스트 가족과 친해졌고 다니던 학교도 완전히 적응하여, 계속 남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미국 공립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1년 이상은 참여할 수 없었다 (신혜림 씨의 <미국공립학교 교환학생, 난 이렇게 했다>를 보면 외국인으로서 같은 공립학교를 1년 넘게 다닐 수는 있지만, 정말 예외적인 경우고 절차도 복잡하다). 미국에 남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사립학교로 전학하여 교환학생이 아닌 유학생이 되는 것인데, 교환학생은 문화 체험과 영어 실력 향상이 주목적이라면 유학생은 미국 혹은 한국에서 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는 훨씬 더 치열하고 비싼 과정이었다.
미국에 남고 싶다는 나의 제안에 부모님은 ‘올 것이 왔구나’하는 눈치였다. 교환학생 관련 세미나 때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유학생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선 내심 마주하지 않았으면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부모님은 다시 끝없는 고민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부모님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비용과 치열한 입시 과정을 옆에서 지원/관리해 주지 못하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자식이 이역만리 떨어져 있으니 바로 옆에 있을 때보단 아이의 상황이 어떤지 파악하는데 제약이 있음은 분명했다.
1년 전과 같이 몇 날 며칠 고민한 부모님은 이번에도 힘겹게 나의 제안을 승낙하셨다. 예상해 보건대, 부모님이 나의 유학 생활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당시 학교에서 받는 좋은 성적이었던 것 같다. 혼자 미국에 떨어뜨려 놓아도 잘 해냈으니, 나의 미래와 진로에 부모님은 과감한 베팅을 하신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시며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맬 결심을 하셨다. (그 당시엔 이 결정이 2023년까지 지속된 유학 생활의 시발점이었다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다니는 공립학교에 남을 수 없으니, 부모님과 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 진행에 도움을 주었던 유학원을 이용하여 다가오는 9월부터 다니게 될 새 사립학교를 물색해 보기 시작했다. 미국 현지의 에이전시를 이용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과는 달리, 사립학교 유학은 한국의 유학원이 직접 미국의 학교에 연락하거나 현지에 상주하는 직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유학원이 학교를 선정하는 요소들로는 좋은 대학교로의 진학률이 가장 중요하고, 학생 수, 교사와 학생의 비율, 학비, 그리고 주위 환경들 또한 고려된다. 유학원 실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랑 잘 맞을 것 같은 3개의 사립학교가 먼저 추려졌고, 부모님과의 의논을 통해 최종적으로 미국 동북부에 있는 버몬트주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6월이 다가왔고 교환학생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기말고사가 마무리되고, 정들었던 친구들과는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으며 작별 인사를 하였고, 보금자리를 제공해 준 호스트 가족과는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지난 1년을 추억했다. 호스트 가족의 성대한 배웅을 받은 후,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하늘 아래 보이는 미국 땅을 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3개월 뒤엔 J-1 (교환학생 비자)이 아닌 F-1 (유학생 비자)로 올게!”
3줄 요약:
1. 한 달여의 적응 기간 후, 미국 학교생활이 수월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적도 괜찮게 받음.
2. 부모님과의 의논 후, 교환학생 생활 후 한국의 학교로 돌아오는 대신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가기로 결정함.
3.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공립학교에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기에, 사립학교로 전학을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