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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온기, 버몬트의 냉기

by 홍머루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유학을 떠나기 전엔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의 집밥은 무척이나 맛있었고, 오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여전히 즐거웠다. 언어의 장벽 없는 익숙했던 환경으로 돌아오니, 미국에서 보낸 9개월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 보낸 여름방학 기간 동안 나는 미국 대학 입학을 위해 필요한 시험 중 하나인 TOEFL (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을 준비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매일 학원을 오가며 공부하다 보니 ‘이게 정말 방학이 맞나?’ 싶었지만,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방학마다 여러 학원을 다녔기에 이 상황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내다 보니 출국날이 금방 다가왔다. 이번에도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인천공항에 나와 배웅해 주셨다. 이번에도 엄마와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였고, 그 모습을 보니 아들 혹은 손자를 먼 타지로 떠나보내는 일이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포옹한 후, 나는 다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을 출발한 지 약 24시간 만에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를 거쳐 버몬트주의 주도인 벌링턴 (Burlington)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학교의 카운슬러 선생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선생님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고, 2시간가량 차를 운전해 내가 지낼 뉴포트 (Newport)라는 작은 마을로 데려다주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작은 시골마을이었지만, 이전에 생활했던 버지니아 지역도 농촌지역이었기에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긴 운전 끝에 도착한 하숙집은 작년과 비교해 훨씬 작고 낡아 보였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백발의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교환학생 시절 내게 따뜻한 포옹으로 반겨주던 호스트 아줌마와 달리, 이 할머니의 첫인상은 무척 차가웠다. 저녁이어서인지, 얼굴에는 짜증과 피곤이 섞여있는 것도 같았다. 할머니는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라고 짧게 말한 뒤 나의 침실로 안내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호스트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이번 하숙집에는 호스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다였고, 내 또래의 아이는 없었다. 이후 할머니가 간단하게 집 내부를 구경시켜 주고 여러 가지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몇몇 규칙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할머니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기 전까지 일주일에 두 번 본인이 일하는 빙고(Bingo) 행사에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혼자 집에 두는 것이 불안하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숙제와 공부할 시간에 영향이 가지 않았음 한다며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할머니는 행사장에서 공부하면 된다며 내 의견을 일축했다. (*여기서 말하는 빙고는 돈을 내고 빙고판을 구매한 뒤, 당첨되면 상금을 받는 사행성 게임이다. 실제로 나는 3개월 동안 하숙집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따라 매주 목요일 저녁과 일요일 점심에 빙고 행사장에 가서 3-4시간씩을 보내야 했다.)


그 외에도 “공부는 무조건 거실에서 해야 한다,” “저녁 8-9시에는 함께 TV를 봐야 한다,” “밤 9시에 본인이 자러 가면 너도 반드시 자야 한다”같은 자잘한 규칙들은 나를 무척 피곤하게 했다. 하숙집 할머니는 매번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았고, 이 하숙집에서의 생활은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할머니를 따라 새로 다니게 될 학교를 방문했는데, 실망감이 더욱 커졌다. 이전 학교는 크지는 않았지만 운동장과 강당이 있는 나름대로의 캠퍼스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새 학교는 ‘사립학교’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낡고 작은 2층 건물 한 채가 전부였다. 처음 학교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할머니께 “Is that all? (이게 전부예요?)”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학교 규모가 작다 보니, 이전에 다녔던 공립학교보다 선택할 수 있는 수업도 현저히 적었다. 이 모든 변화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나는 앞으로의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현실이 되었다. 학교 안팎에서 내 의견은 묵살당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당시 10학년이었지만, 카운슬러 선생님은 나를 7~8학년 수준의 영어 수업에 배정했다. 작년에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받은 꽤 괜찮은 영어 성적을 보여드려도, 선생님은 영어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며 완강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숙집에서도 할머니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들에 반기를 들었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나를 문제아라 여기며 카운슬러 선생님께 일러바쳤다. 유학원을 통해 하숙집을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동네가 워낙 작아 다른 마땅한 하숙집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처음 미국 생활을 했을 땐,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해서 한국 음식이 그립지도, 향수병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2년 차에는 상황이 달랐다. 여름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다녀오며 가족들을 만나고 익숙한 음식을 먹다 보니, 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새삼 깨닫게 됐달까? 작년에는 맛있게 먹었던 미국음식들도 올해는 입에 맞지 않았고, 가족과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절망과 무기력함을 온몸으로 느꼈고, 많은 날을 눈물로 보냈다. 하지만 버몬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줄 요약:

1. 한국에서 공부하며 바쁘게 여름방학을 보낸 후 버몬트의 한 사립학교로 전학을 감.

2. 새 하숙집의 할머니와는 성격차이로 인해 사사건건 부딪혔고, 새 학교의 시설과 수준도 많이 떨어졌음.

3.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심한 향수병까지 겪으며, 버몬트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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