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방 안에서 자랐다. 방안엔 다행히도 책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애정하던 책은 백과사전과 역사책이었다. 나는 아마도 타고나기를 강력한 T인가 보다. 동화책이 그보다 훨씬 많았으나, 같은 동화책을 읽고 또 읽는 언니와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용 다 알았는데 왜 또 보는지. 하지만 백과사전 속에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들이 가득했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겐 그렇게 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면이 보여서 다 외울 만큼 읽었다. 그러고서 역사책을 읽으니, 재미있어서 잠이 다 안 올 지경이었다. 역사책에 한 줄 적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이 뒤얽혀 있었을지를 상상하자니 밥 안 먹어도 배불렀고 친구 없는 것이 내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역사 속 인물이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현재의 모습이 달라졌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까. 너무나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으니 나는 항상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고, 국민학교 수업시간이 재미없어서 매일 딴생각을 했다. 언젠간 나도 그 일들이 벌어진 곳에 직접 가서 내 눈으로 구경할 거야.
중학교를 지나고 눈코 뜰 새 없던 고등학교시절, 어린 날의 꿈은 살짝 잊혔었다. 당시 한국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어서, 어른이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자 현실적으로 포기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대학은 원하던 사학과를 여러 가지 이유로 지원하지 못하고 그와 비슷한 점수를 요구하는 독문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제2 외국어가 불어였는데, 뜬금없이 독문학을 전공하게 된 나는 학교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밖으로 나돌았다. 세상구경한다는 핑계로. 그 시절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어서 젊은이들이 슬슬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기 시작했고 나도 꼭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예상되는 가족의 반응을 말하자면, 아버지는 당연히 '한번 가봐라! 안 가보면 모른다'인데 비해 모친은 당연히 '절대 안 돼' 였어서 나 나름대로 획기적인 모략을 꾸몄다. 독일에 두 달 어학연수를 가서 몰래 유럽여행을 다니는 것으로. 그렇게 말씀드리면 공부가 최우선인 모친도 반대하지 못할 테니, 가정의 평화도 지킬 수 있는 묘수였다. 아버지가 학비, 비행기표, 생활비를 내주셨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유레일패스와 여행경비를 마련했다.
1994년 여름 두 달 동안 뮌헨 Muenchen에서 수업을 들었다. 한국에서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이지만 직접 겪는 독일은 많이 달랐고,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이 매일 매 순간 벌어졌지만 그 모든 순간이 즐겁고 좋았다. 주중에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주말에는 새벽부터 출발해 유럽 각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어느 주말, 나는 유럽에까지 왔으니 알프스를 꼭 보겠다는 일념으로 뮌헨기차역에서 고속열차 ICE를 타고 취리히에 내려 Interlaken에 가는 기차를 탔다. 창밖을 내다보니 독일하고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많이 낡은 기차여서 창문도 낡아 약간 뿌연데도 계곡 바닥의 조약돌이 선명하게 보일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름다운 베르네~'로 시작하던 유명한 요델송이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더니 깎아지른 듯 한 높은 산 꼭대기에 눈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우와. 이윽고 점점 가까워지는 정상의 모습을 본 나는 그만 굳어버렸다.
고등학교시절 지구과학시간에 배웠다. 물이 풍화작용으로 깎아낸 계곡을 V자형 계곡이라고 하고, 빙하가 깎아 낸 계곡을 U자형 계곡이라고 한다고. V자형 계곡은 한국에도 흔히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이해가 되었는데, U자형 계곡은 아래 같은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산정상을 보여주는 엄지손톱만 한 사진만 붙어 있어서 나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진출처 https://www.mountainiq.com/europe/alps/
나는 이상하게도 3D로 뭔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엄청난 길치일 정도인데, 저 삼각산을 보고서 어떻게 U자와 연관을 짓는단 말인가. 하지만 엄청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빙하지형이 만든 U자형 계곡'만 외워 시험을 보곤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저런 삼각산이 두 개 있고 그 사이의 계곡이 넓은 U자 모양이었던 것이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빙하가 그렇게 거대했단 말인가.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상상 속의 거대한 빙하에 짓눌린 것처럼.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고 하더니, 진짜였다.
아.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구나. 저 거대한 U자형 빙하계곡은 내게 거대한 충격이었고, 누구보다 건조하고 무심한 내가 그놈의 U자형 계곡에 그렇게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또 충격을 받았다. 인터라켄에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고 올라가면서 느낀 추위나, 정상에서 본 만년설이나, 전부 새롭고 신기하고 좋았지만 그놈의 U자형 계곡만 한 감동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시간과 자금이 허락하는 한, 직접 가서 본다. 그게 뭐든. 특히 책에서 본 것들이라면. 그를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한다. 다리에 힘 빠지면 구경 못 다니니까. 덕분에 나는 극내향형인데 웬만한 외향형 보다 가 본 데가 많다. 순상화산, 주상절리 보러 제주도, 울산 반구대암각화, 부산 동삼동 패총, 고창 고인돌 유적, 돌이 정말 떠 있나도 확인하고, 엔타시스 기둥도 직접 보러 부석사, 아슐리안 손도끼 보러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전주비빔밥과 한정식 먹어보겠다고 전주, 팔만대장경 직접 보러 해인사, 서울의 백제유적 석촌고분, 병마용 보러 중국의 시안, 만리장성, 천단,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배경인 열하(현재지명 승덕), 영국의 스톤헨지, 대만의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고성, 공묘, 미국 중부의 인디언 절벽거주지 Mesa Verde, 그 외 수없이 많은 박물관들.
실물을 직접 본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시안의 병마용은 사진으로는 수천번 봤는데, 직접 가서 본 것은 완. 전. 히. 달랐다. 그곳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Context(맥락)이 따로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그런 것을 만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감동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이 허약한 몸을 끌고 또 떠나나 보다.
이제부터는 나의 그 특별한 호기심해결 여행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