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우리 딸과 나는 우여곡절 끝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렸다. 여러 번의 딜레이 끝에 게이트에 나와보니 공항이 거의 마비될 만큼 여기저기서 싸우고 난리가 났었다. 유래없는 대폭설로 도로도 마비상태고, 우리가 타려고 예매했던 파리까지 가는 유로스타도 전면 취소되었단다. 남편이 출장가 있던 파리에서 며칠 구경하고, 런던에 돌아와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우리가 프랑스에 갈 방법이 막히는 바람에 남편이 영국으로 와서 집에 가는 날까지 런던에서 쭉 보내게 되었다. 덕분에 예상치 않았던 시간이 생겼던 우리 가족은 그동안 뭐 할 것인가에 대해 토의하게 시작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과 함께.
나:그럼 우리 대영박물관에 가...
딸: 안돼!!!!!!!! 절대 안 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내미가 절규했다. 박물관이라는 데는 절대로 안 간다며 팔짝팔짝 뛰었다. 여기에는 내 잘못이 크다. 고대사에 관련된 박물관을 선호하는 나는 딸내미가 어리다 보니 봐줄 사람도 없고 해서 항상 데리고 다녔었다. 그러나 역사 이야기만 하려고 하면 도망가던 에너지 넘쳐나던 딸내미는 정적인 박물관이 싫었는데, 그 직전에 온갖 감언이설로 구슬려 데리고 갔었던 전시가 하필이면 마야문명이었어서, 딸내미가 무서워서 너무 싫었다고 다시는 안 간다고 그때 선언했었다. 엄마는 왜 저렇게 공포스럽게 생긴 마스크나 깨진 도자기 쪼가리나 보러 다니냐면서. 그래서 처음부터 대영박물관은 계획에 없었었다.
적당한 할 말을 찾느라 일시정지한 나에게 남편이 일격을 가했다.
남편: 나도 박물관은 안 가고 싶어.
그간 아이 교육에 도움이 될까 해서 꾹 참고 나를 따라다닌 것이었다고 했다. 이런. 이제까지 가 본 박물관 전부를 합쳐도 대적할 수 없는, 그래서 어떻게든 일생에 한 번은 가봐야 할 대영박물관에 안 간다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싫다는 두 사람을 끌고 갈 만한 기운이 내겐 없었다. 결국, 남편과 딸내미 둘이서 재미나는데 구경 가고 나만 대영박물관에 가기로 결정했다.
대영박물관에 가던 날 당일, 너무 흥분하여 박물관 문 열 때 들어가서 모든 홀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나니 미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솟아났다. 세계사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유물이 거기 다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문 닫는 시간이라고 방송하는 바람에 급히 뮤지엄샵으로 달려가 수많은 유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로제타스톤 글자를 새긴 컵을 기념품으로 사서 아쉬움을 뚝뚝 흘리며 나왔다.
그리고 2년 후, 5학년이 된 딸은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너무 재미있는 것을 배웠다면서 집에 오자마자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이빨은 빠져갖고 발음은 세는 주제에 익숙지 않은 어려운 역사용어를 말하려고 입술에 힘을 줘 가며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는 해독이 안되었는데, 로제타스톤에 그리스어, 이집트 민중문자, 그리고 신성문자가 적혀있어 해독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고. 로제타스톤의 발견은 역사적 사건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침착하게 다 들은 나는 한마디 했다.
나: 나 이거 직접 봤어.
딸: (버럭) 엄마가 언제 나 빼놓고 혼자 그런 걸 보러 갔었어?
나: 네가 안 간다며. 대. 영. 박. 물. 관.
딸내미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는 것을 곁눈질하며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 우리 딸은 여행 갈 때마다 일 순위로 박물관부터 가는 나를 입이 닷발은 나와서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역사시간에 엄청나게 잘난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직접 본 것하고 책에서 본 것 하고는 하늘땅, 별땅, 천만 배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나도 시간과 자금이 허락하는 한 직접 보러 다니는 것이고. 외우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미술 하는 딸내미가 역사과목은 항상 A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고들은 가락으로.
따라다닌다고 해서 여행지에서의 아까운 시간을 박물관에 투자하는 것이 즐거울 리 없는 두 사람을 위해서 나도 묘수를 짜냈다. 뮤지엄샵 헌팅 Museum Shop Hunting
내게는 미치게 좋은 박물관 구경을 두 사람이 조용히 잘 따라다니고 나면, 박물관 출구 근처에 있는 박물관샵의 유리문 앞에 셋이 서서 외친다.
하낫, 둘, 셋, 뛰어
셋이서 달려들어가 샵을 이 잡듯이 뒤져서 가장 쿨 한 굿즈를 찾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기한 굿즈이거나, 그날 본 전시를 잘 표현한 굿즈이거나. 잘 참아준 두 사람을 위해 돈은 내가 낸다. 그렇게 찾다 보면 진짜 재미있고 좋은 물건들을 찾을 때가 많다. 장식해도 되고 써도 되는. 가족들과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할 얘기도 많고 재미있다. 그렇게 뮤지엄샵헌팅은 우리 가족의 중요한 놀이가 되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의 뮤지엄샵에서 산 금강경 필사세트. 남편이 골라 준 것이다. 포함된 붓펜으로 따라쓰면 서예연습도 되고 다 쓰고 나서 펴면 고대의 두루마리 전체를 내가 쓴 듯한 희열이 있다. 불자는 아니다.
그리고 이 뮤지엄샵헌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두말하면 잔소리. 국립중앙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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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자주 가다 보니 이것보다 훨씬 많지만 간단하게 소개해서 이만큼이다. 오랫동안 지인들에게서 너는 왜 이런 데다 돈을 쓰냐는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아왔다. 극내향인에 허약한 체력을 가져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나는 아담한 내 서재에 이 많은 굿즈들을 모셔두고 틈틈이 감상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역사에 기록된 유물의 모양이라서이기도 하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면 그 시절의 대단한 미감을 표현한 것 아닌가. 내가 답사했던 유적들을 형상화 한 굿즈도 너무 좋다. 석굴암무드등같이.
며칠 전 본 뉴스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장하려면 긴 줄을 서야 한다며, 그렇게 들어가자마자 뮤지업샵으로 뛰는 사람들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우리 셋의 뒷모습이 저렇겠지. 뮤지엄샵헌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많은 사람들도 알게 되어서 기쁘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때는 이렇게 좋은 전시를 공짜로 본다는 죄책감을 뮤지엄샵에서 푼다. 내 나름의 기부다. 사실 굿즈보다 책을 더 많이 사기는 하지만 서로 윈윈 하면 좋지 않나.
덕분에 나는 부자다. 마음부자. 전 세계에서 모아 온 굿즈들에 둘러싸여 사는.
다음 뮤지엄샵헌팅은 어디로 갈까.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