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벙개는...

by crowbamboo

"어떡하지? 오늘 칭구들과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는데, 갑자기 부장님이 벙개를 쳤으니...ㅠ.ㅠ

칭구들에게 못 간다 해야 하나? 벙개에 참석하지 않으면 찍힐 것 같은데..."

오늘도 김대리는 회사 생활하기 참 힘들다는 생각과 함께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없다.

지킬 필요 없는 약속 또한 없다.

혼잣말로 한 약속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약속은 신뢰이고 책임감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약속을 하곤 한다.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한 약속들은 넘쳐난다.


엄마에게 혼나기 싫어 ' 0 0 하지 않을게요, 앞으로 잘할게요, '와 같은 상황 모면용 약속부터,

담배를 끊겠다, 술을 줄이겠다 와 같은 자신과의 약속, 친구나 선후배 들과의 약속 등등 수많은 약속을 끊임없이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한다.


교육의 효과인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찌질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고 마치 죄를 지은 느낌이 든다.

불쑥 던진 한마디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우린 생각한다.


하지만, 약속을 숨 쉬듯 던지면서 약속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거나 지킬 의사가 없는 듯 보이는 사람은 믿지 못할 사람, 친분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딱지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붙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사람을 잘못 판단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경험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경우도 있지만 불쑥불쑥 기억날 때면 다시금 화가 나고 나를 책망한다.


대학2학년 때였다.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한 달을 살아야 하는, 항상 배고프고 경제적으로 부족한 느낌이 드는 시절이었다.

새벽부터 오일장을 다니시는 부모님이 추위와 더위를 견디면서 매달 지정된 날에 한 달 용돈을 보내주셨다.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용돈을 받고 열흘쯤 지나면 항상 돈이 없었다.

그래서 용돈이 오는 날에 한 달치 식권과 안성탕면 2박스를 사두었다.

책값이나 학원수강과 같은 교육에 필요한 돈은 거의 들지 않았다.

먹고 놀기 바쁜 때였으니까.


어느 해 꽃이 한창 필 때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고향 친구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한 날 친구를 다방에서 만났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궁금하던 차에 앉자 말자 만나고자 한 이유가 뭔 지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태어나서 내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왜, 무슨 일 있나?'

'내 여자친구가 임신했는데 수술을 해야 해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계속 물었다(그 당시 그것이 합법인지 불법인지 알지는 못함).

'얼마 필요한데?'

'00만 원'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노.

지금 그만한 돈이 없다.

다음 달 초가 되어야 용돈 온다 '


다음 달 초까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친구가 얼마나 다급하면 이런 부탁을 할까라는 안타까운 맘에

'꼭 필요하면 그때 빌려줄 게'

'고맙다. 그때 빌려주면 몇 달 후에 꼭 갚을 게'

그렇게 대화를 나눈 후 우린 헤어졌고, 시간이 흘러 다음 달 초가 되자 부모님이 용돈을 보내주셨다.


나는 친구를 만나 식권과 라면갑을 제외하고 남은 한 달 치 용돈 대부분인 00만 원을 빌려주었다.

친구는 고맙다며 몇 개월 후에 반드시 갚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한 후 우린 헤어졌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친구로부터 연락조차 없었다.


갚겠다고 약속한 날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고향 동네에서 그 친구를 만났지만 나는 돈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갚겠다고 했으니 곧 갚겠지, 설마 내 사정을 아는 친구가 돈 떼먹겠어’라고 생각하며 친구를 믿고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몇 개월 후에 갚겠다’ 던 친구의 말은 한 번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나는 금융회사에 취직하여 창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책상 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 00다. 잘 지내나?'

바로 그 친구였다.

갑자기, ‘부모님이 엄동설한에 시장바닥에서 시린 손 불며 애써 모은 귀한 돈을 빌려간 후,

갚겠다는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한 괘씸한 놈이 전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그래, 어쩐 일이냐'라고 묻자

그 친구가 말한다.

'나 지금 설악산에 왔다가 차비가 떨어져서 그런데 돈 좀 빌려주라'

‘이런 씨부럴 썩을 놈.

지놈이 내게 한 짓이 있는데 또 돈 빌려 달라고.

부모님이 눈물 나게 모은 돈을 빌려 가서, 지키지도 않을 갚겠다는 약속만 해놓고 갚지도 않은 나쁜 놈이 똑같은 짓을 또 하려고…’라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분노가 치솟아 올랐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00야. 그런 돈이 어딨노. 안된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그 친구와 만난 기억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한두 번씩 이런 경험을 했을 수 있다.

살면서 많고 많은 약속을 하고 지켜지지 않는 경험을 하지만 돈과 관련된 약속은 특히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의 기억 속에도 이런 좋지 않은 일들이 여러 건 저장되어 있다.


지방지점에서 십 수년을 근무하다 서울로 왔다.

서울에도 열심히 살고 있는 고향친구들이 있었다.

매우 어렵게 자리를 잡아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었다.

제법 돈을 모은 친구였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것이 경기 변동에 민감하다 보니 자금의 흐름이 들쑥날쑥하였다.

어느 날 급히 결제할 일이 있는데 자금 회전이 순간적으로 막혀 돈이 필요하다며 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아는 안면이 무섭다고 거절하자니 은행직원이 천만 원도 없냐고 원망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내게 중요한 친구가 부탁한 건이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돈 천만 원 구할 수 있는지 묻자 아내는 마이너스 대출 약정된 것에서 출금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아내 마이너스대출 통장에서 천만 원을 인출하여 그 친구에게 빌려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에 다닌다고 하면 안정된 직장에 돈 많이 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말 못 할 힘든 사정을 안고 산다.

사람 사는 것은 직업이 뭐든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은행에서 빌린 대출이자 갚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출로 시작하다 보니 제대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빨리 돈 벌어야지 하는 생각에 아무런 정보 없이 어쩌다 주식투기를 하는 등의 행동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은 고달프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임에도 돈을 빌려 달라고 애처롭게 부탁하니 아내의 대출 통장에서 돈을 꺼내 빌려준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 친구가 빌려간 돈을 갚겠다는 날이 되었다.

하루가 다 가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잊었나?'

'전화해 볼까'

'아니야. 며칠 기다려 보지 뭐'라고 생각하며 일주 일쯤 지나갔다.

아내에게 언제까지 빌린 돈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속상했다.

아내는 그냥 기다릴 뿐 아무 말이 없다.


한참이 지난 후,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친구에게 문자를 넣었다.

'친구야. 그 돈은 아내 마이너스통장에서 꺼내 빌려 준거라 다시 갚아야 한다.

언제까지 돌려줄 수 있나?'

'아직 공사대금 회수가 안되어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수개월이 지났지만 빌려준 돈은 돌아올 줄 몰랐다.

그동안 그 친구는 영업을 한다며 이 사람 저 사람을 고급 음식점과 술집으로 불러 접대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런 소식이 들릴 때마다 '한두 번 술집 가는 비용이면 내 돈 갚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친구의 행동에 배신감만 쌓여 갔다.

하지만 그 친구가 돈을 주지 않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잊지 않도록 가끔씩 문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그 친구가 돈을 빌려 간 지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빌려줄 땐 서서 주고 돌려받을 땐 엎드려 받는다’는 말이 있다

.

신뢰 없는 사람과 사귀게 되며 반드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참 슬프고 고약한 말이다.


그날 이후 여러 차례 그 친구를 보았지만 이미 깨져버린 신뢰는 다시 붙일 수가 없었다.

여러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외하면 그 어떤 사적인 관계는 갖지 않았다.

아니 ‘가지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가끔씩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기지, 내가 좀 모자란 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차라리 ‘약속 지켜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뒤따라해 본다


돌려받을 거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행한 돈거래는 약간의 삐걱거림에도 신뢰가 무너질 수 있고, 그 순간 돈도 친구도 모두 잃을 수밖에 없다.

가까울수록 돈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받지 않아도 된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을 때 빌려줘야 친구라도 건질 수 있다.


돈이 개입된 약속만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개인 간의 사적인 약속이나 업무에 관한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신용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업무나 업무 외적으로 이런저런 약속들을 많이 하게 된다.

두 사람 간 또는 여러 사람 간 약속을 할 수 있다.

요즘은 이런 약속을 카톡 등을 통해 수시로 통지하고 있어 모기 똥만큼의 관심만 있어도 약속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약속시간이 가까워졌을 때나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을 때 연락을 하면 ‘미안, 오늘이 그날인지 몰랐어’라며 얄미운 소릴 해댄다.

또 어떤 사람은 약속 날이 다가오면 집안에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 지 ‘오늘 제사다, 결혼기념일이다, 누가 아프다, 집에 누가 오기로 되어있다 등등’이라며 약속을 깨 버린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전에도 그렇게 행동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상습적이란 얘기다.

그런데 윗사람과의 약속은 절대 까먹지 않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참 특이한 뇌구조다.


아무리 사소한 약속도 중요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미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취소하는 예의를 갖는 것이 좋다.


그런데, 부하직원이나 동료와 약속 있는데 갑자기 상사가 번개 치면 어떡하나?

직장생활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 중 하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부행장 시절에 이 주제로 젊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코로나로 점심을 사무실에서 주로 하던 때였다.

우연히 그날 20대 중반,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직원과 함께 식사를 한 후,’ 누가 더 꼰대일까?’라는 주제로 대화를 하며 이런 질문을 했다.


30대 초반 직원은 ‘선약한 동료의 의견에 관계없이 당연히 상사와의 식사자리에 참석한다(선 결정 후 선약 파기-무조건 벙개 참석)’였고,

20대 후반의 직원은 ‘선약한 동료에게 상사가 벙개친다고 먼저 말하고 상사와의 자리에 참석한다(선 통보 후 선약 파기- 다만 불가피한 상황이면 벙개 가지 못할 수 있음)’였다.

하지만, 20대 중반의 신출내기 직원은

‘아무리 상사라도 갑자기 벙개치면 안 된다.

나는 선약한 동료와의 약속을 지킬꺼다(무조건 선약 우선)’라며 젊은 패기를 보여 줬다.


그러자 회삿밥을 조금 더 먹은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니 그러다 찍힌다. 앞으로 회사생활 무지 어려워질 수 있다’라고 말하자 모두가 같이 웃었다.


이즈음에서, 회사원들은 ‘벙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다.


상사는 자신의 사정만 생각하며 벙개를 친 것은 아닌지?

직원들이 좀 더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 여유를 두고 얘기할 수 없는지?

아니, 벙개가 시대에 맞는 것인지?


또한, 부하직원은 상사가 벙개치면 싫어하더라도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지?

싫어하면서 따라갔다가 상사가 벙개 쳤다고 뒤에서 욕하는 자신의 모습이 찌질하게 보이지 않는지?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게 정답인지 알지 못한다.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다.

다만,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벙개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당당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벙개를 친 상사도 그러길 바랄 것이다(그 이유: 부하직원들이 무조건 따라올까 봐 벙개 치기를 꺼리는 상사들도 많이 있음)


하지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쉽게 생각해도 좋을 약속, 언제든 임박한 시간에 전화 한 통 불쑥하여 약속 못 지킬 것 같다고 말해도 좋을 약속은 없다는 것이다.

약속은 약속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약속이 있는 날,

약속된 시간을 알리는 시계의 외침에 맞춰

‘짠’하고 등장하는 것보다,

10분쯤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하여

주변 상황도 파악하고

약속한 사람을 기다려 주는 것은

빛나는 회사생활을 예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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