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아이 손잡고 길을 나섰다.
휘영청 둥근 달이
불 꺼진 빌딩 끝에 걸렸다
인적 없는 길에
차가운 북풍은 늦을 새라
옷깃을 잡아당기고
그 북풍에 놀랄까
아이를 품속으로 당긴다
달빛 그림자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지만
길을 걷는 건 크고 작은 두 그림자뿐
고달픔에
비틀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달은 웃는다
그런 달이 미워 눈물이 난다.』
우리 또래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힘들었기에 그런 어려운 상황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의 부모님은 5일장을 다니시며 옷을 팔았다.
울진에서 시작하여 죽변, 호산, 매화 시장을 돌고 나면 하루를 쉬는 5일장에서 옷장사를 하셨다.
호산과 매화시장이 울진과 죽변에 비해 거리가 멀었고 교통이 열악했다.
가물에 콩 나듯 있는 새벽버스를 타고 시장에 도착하면 정해진 장소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물건을 진열하셨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등에 업혀 시장을 다녔다.
이렇게 지정된 장소에 자리를 깔고 장사를 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엄마가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산골 이 집 저 집 다니시며 옷을 팔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등짐장수와 같았다.
여자의 몸으로 그런 힘든 일을 하셨다.
그러다 여러사람들이 모여 같은 장소에서 물건을 펼쳐두고 장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부부가 항상 함께 다녔다.
장사를 하신 지 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옷 보따리가 왠만한 남자 여럿이 함께 들어야 겨우 들릴 정도로 부피가 커졌고 무거웠다.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 곤 크고 무거운 옷보따리를 공동으로 빌려서 사용하는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이었다.
산더미 만한 옷 보따리를 남자들이 트럭에서 낑낑거리며 내려 놓으면 여자들은 땅바닥에 펼쳐진 큰 돗자리 위에 물건을 디스플레이 한 후 하루 종일 앉아 손님을 기다렸고, 어쩌다 온 손님에게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물건 값을 실랑이하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정해진 날에는 각자 정해진 장소에 옷을 펼쳐두고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옷을 팔았다.
눈이 오고 비가 와도 시장에 가셨다.
모든 옷 택에는 그 집만의 원가 비밀 암호가 적혀 있다.
우리집 원가 암호는 정확히 기억 나진 않지만 ' 서,고,하,자,저,여,수,피 보'였던 것 같다.
서는 1을, 여는 2를… 의미하는 글자였다.
암호가 왜 이렇게 어려운 순서로 정해졌는지 모르지만 어쨌던 각각의 숫자를 대표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 원가에서 대략 3,4십 프로 마진을 붙여 팔았다.
요즘 사업을 하시는 분들의 마진을 생각하면 엄청 높다고 생각되지만, 그렇게 하루 종일 노상에 앉아 팔아도 총매출이 작아 얼마 남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 때쯤 울진시장에 상가 건물이 들어서면서 5일장을 다니시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가에 입점하여 장사를 하였다.
고등학생 때에는 부모님이 잠깐 가게를 비운 사이 손님이 오면 원가 암호를 보고 일정 마진을 붙여 가끔씩 물건을 판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럴 땐 약간의 판매보수를 나 스스로에게 주기도 했다.
시장바닥에서나 상가에서 장사할 때 하루 종일 물건을 파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남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다니며 술 마시고 떠들고 가끔씩 싸우는 것이 일이었다.
항상 저녁 때쯤 되면 모든 남자들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고, 목소리는 온 시장바닥을 흔들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렇게 가정경제를 억척스러운 아내들에게 맡기고 남자들은 황금 같은 청춘을 술과 함께 보냈다.
물론 그 분들은 5일장을 다니실 때 가장으로서 집채만 한 옷보따리를 올리고 내린 것 만으로도 본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태어나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는 짧은 기간을 보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처럼 가열차게 돈을 벌기 위해 활동을 해야 한다.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는 이유도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나 좀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함 일 것이다.
그렇게 한단계, 아니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경제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또래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경제교육을 제대로 받은 경험이 없는 것 같다.
돈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히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가르치며 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유교적 도덕과 예절이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천년 전 중국 사람 관중(고사성어 ‘관포지교’의 주인공으로 제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든 공신임)은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고 하였고,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 본, 그 유명한 맹자도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無恒産 無恒心)’며 경제적 자유로움을 강조하였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돈을 버는 행위를 천시하고 저속한 것으로 여기며 제대로 교육을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왔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월급을 받아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재형저축 같이 이자율이 높은 예금에 급여의 아주 적은 금액을 입금하는 것 외에는 돈을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있는 만큼 쓰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지금은 대출받기도 까다롭고 금리도 일반인에 비해 높아졌지만,
그때는 은행직원에게 대출을 쉽게 해 주었다.
하지만, 급여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에 한번 생긴 대출은 쉽게 갚을 수 없었다.
마치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과 같이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 같은 것이 대출이었다.
IMF가 터진 90년대 말쯤, 대출금리가 너무 높아져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쯤 되면 '나도 돈 좀 많이 벌어봐야겠다'는 생각이나 각오가 생겨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러지 못했다.
아마 은행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돈이 돈으로 보여 고객의 돈에 손을 대는 것을 가장 좋지 않게 생각하는 곳이 은행이다 보니 은행에 처음 들어 가면 선배들은 '돈을 돈으로 보지 마라. 그냥 우리가 취급하는 상품일 뿐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현금거래 규모가 큰 지점의 경우 금고에 지폐와 동전 주머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우리는 쌓여 있는 동전 주머니 더미를 밟고 다녔지만 그 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씩 시재금 횡령 같은 금전사고가 나면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식의 교육은 더욱 강화되었을 뿐이다.
그런 시절이 지나고 경제교육을 많이 받은 새로운 세대가 은행에 들어왔지만,
은행원의 돈에 대한 개념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금전사고 위험 때문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위험을 각인이라도 시켜주고 싶어서 인지 잊을 만하면 금전사고가 이 은행, 저 은행에서 발생하였다.
심지어 일반 기업에서도 대형사고가 뻥뻥 터져 주었다.
사고가 발생했다 하면 여러 감독기관에서 다양한 대책을 세우는데 대부분의 대책이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었다.
은행원은 주식이나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도 준법감시인에게 신고를 해야 한다.
항상 개인적으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주의하라는 것이 감독당국과 은행의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직원들은 단순히 적금에 가입하거나 은행에서 판매되는 펀드에 가입하는 것이 돈 버는 중요한 경제활동이다.
나도 은행 재직기간 동안 주식투자 몇 번하여 투자금의 많은 부분을 홀라당 까먹은 것 외에는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았다.
사실 지점장 때까지 한 번도 적금이외의 투자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몸이 좋지 않아 열심히 북한산을 오가고 있을 때였다.
혼자서 북한산 문수봉에 올라 갔다가 털털거리며 내려오고 있는데, 바로 몇 미터 앞에 내 또래 중년남자 두 분이 큰소리로 대화를 하며 가고 있었다.
한 남자분이 ‘친구야, 요즘 환율 보니 달러를 사면 재미 좀 보겠더라’ 고 말하자,
다른 분이’그렇지, 달러를 사면 괜찮을 것 같아’라고 맞장구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분들의 목소리가 커서 우연히 들은 대화였지만 일리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출근하여 내가 잘 아는 외환업무 경험이 많은 지점장에게 전화하여 달러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지금 괜찮은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약간의 달러를 구매하였고 한달도 되지 않아 약 꽤 많은 환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은행생활 하면서 자력으로 투자하여 수익을 올린 첫 경험이었다.
나와 같이 투자에 무관심하게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 즐비한 곳이 은행이다
평생 돈을 만지는 직업이라 돈 버는 감각이 뛰어날 것 같지만 ‘글쎄요’다.
대부분 보수적이고 안전한 투자, 즉 적금 같은 것만 찾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투자에 관심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직원들이 늘고 있지만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 성공적인 투자로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한 은행원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대부분의 은행원들은 이런 저런 일에 목돈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하며 그냥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렇게 오랜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광야에 홀로 서게 되면 가장 먼저 부닥치는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이다.
퇴직금 중 일부로 대출 갚고 나면 미래를 위해 남은 돈이 별로 없는,
속 빈 강정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제서야 젊은 시절 경제적 독립을 위해 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영원할 것 같은 회사의 안락한 그늘에 안주하며 정당하게 돈 버는 방법을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지만 새롭게 뭔가를 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기에 아쉬움만 쌓일 뿐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나 스스로 금융자산에 대한 공부 등을 통한 적극적인 투자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아내가 하는 조그만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적은 있었다.
1997년1월에 아내가 대출 이천만원을 대출받아 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독서실을 인수하였다.
아내는 낮 12시쯤 독서실 문을 열었는데 그때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아내는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더나은 가정살림을 위해 독서실을 운영했던 것이다.
아내가 하루 종일 독서실을 지키고 있으면 나는 회사일을 마치고 집에서 간단히 식사한 후 아내와 교대하기 위해 독서실로 향했는데 회사업무 끝나는 시간이 대부분 밤 9시 이후였기 때문에 내가 독서실에 도착하면 밤 10시쯤 되었다.
잠깐 아이들과 놀고 난 후 아내는 어린 둘째를 데리고 걸어서 20분쯤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갔고 나와 첫째만 독서실에 남았다.
독서실은 새벽 2시까지 문을 열었다.
1일 2천원, 한달 4만원 독서실 이용료를 받았는데 처음 한 두 달은 수입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가 부도날 것이라는 소문에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하였고 그 불안감은 곧바로 독서실 사업에 영향을 미쳐 독서실을 찾는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월 1~2백만원 정도 올라오던 수입이 몇 십만원으로 떨어졌다.
IMF라는 힘든 시기에 독서실을 이용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지만 새벽 2시까지 독서실을 이용하는 학생은 반드시 매일 한두명은 있었고 학행들이 가고 나면 나는 독서실을 청소해야 했다.
의자를 책상위로 모두 올린 후 진공청소기로 깨끗이 청소하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너무 피곤할 때면 조금 일찍 청소를 시작하곤 했는데, 학생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려고 공부하는 학생 주변 책상을 집중적으로, 최대한 시끄럽게 의자를 올리고 청소기를 돌리곤 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꿈쩍 않고 공부하는 학생이 얄밉게 보이기도 했다.
청소를 마치면 새벽 2시 반에서 3시쯤 되었고 그때서야 수부실에서 차고 있는 딸을 깨워 집으로 갔다.
가을 새벽 달은 휘영청 밝고 기온은 쌀쌀 해지는데 인형 같은 예쁜 딸을 품에 꼭 안고 아파트 단지 안을 걷고 있으면 내가 왜 이렇게 사나 하는 슬픔이 밀려와 눈물을 흘리곤 했다
.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 치곤 너무나 힘든 방법이었다.
그 때 결심한 것이 있다.
앞으로 살면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더라도 절대 ‘남들이 잘 때 내가 눈떠 있어야 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내게 많은 것을 남겨준 시간이었기에 이런 활동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집안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돈을 번다는 것과 회사가 돈을 많이 벌어 더 잘되도록하는 것은 같은 의미라고 생각 할 수 있다.
회사가 잘되어야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아 기본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있기에 틀린 생각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회사원은 정해진 기간동안에만 회사의 넓은 그늘 속에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에 회사의 그늘을 벗어나는 순간 강렬하게 내리쬐는 온갖 무서운 빛들에 회사원이란 연약한 피부를 노출 시킬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회사원의 운명을 완벽하게 잊고 젊은 날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회사원이라면 회사일에 충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항상 지켜야 할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를 무시한 체 일해야 할 시간에 핸드폰으로 주식거래를 하거나 가상자산 거래를 하는 등 다른 일에 힘을 쏟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원이라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고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점장, 본부장, 부행장 시절에
직원들에게 정해진 규범 속에서 불법적이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고 권유했다
.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과거와 달리 돈을 버는 방법이 다양해졌고 그 시류에 맞춰간 경제적 부를 얻은 직원도 상당수 있다.
내가 아는 젊은 직원도 좋은 투자성과를 얻어 현재 강남으로 이사했는데
참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
다만,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투자하고자 한다면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감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경제적 자유를 더욱 빨리 잃는 지름길이다.
다행히 요즘 젊은 직원들 중 관심분야가 같은 여러 사람이 회사일을 마친 후 또는 휴일에 모여 함께 공부하거나 외부강사를 초청하여 강의 받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직원들 면면을 보면 일을 잘 할 뿐 아니라 회사일에 매우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다른 동년배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경제적인 자유를 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차 강조하지만 아무리 경제적 자유를 위해 노력하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면 안 된다.
은행원으로 34년을 근무하면서 수십 억원 거액을 고객통장에서 몰래 횡령하여 구속된 경우, 단돈 10만원을 시재금에서 횡령하여 면직된 경우, 고객과의 평소 친분으로 기준에 맞지 않은 대출을 해주고 향응, 접대를 받거나 일시적으로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경우, 자신의 친인척명의로 전결권자 승인 없이 또는 서류를 위조하여 대출해준 경우 등등 위법부당한 방법으로 발생하는 나쁜 경제활동을 무수히 봐왔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사용한 직원의 끝은 항상 비극적이란 것이다.
세상에 공짜돈은 없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가 쓴다는 것은 언젠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오는 일이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경제적 자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감이 아닌 실력으로,
부정한지 않은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적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