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나 유럽과 같이 한 번 여행을 가기 위해서 큰 마음을 먹고 길게 가야 하는 나라들이 있다. 부지런하게 여행하는 것으로 유명한 우리 한국인이라면 이 여행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루의 일정을 분단위로 짜고, 랜드마크와 유적지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면서, 맛집마저 알뜰하게 섭렵하기를 십 수일동안 반복한다. 이래야만 아깝지 않게 여행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내 주위의 대부분도 그런다.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대표적으로 일상 속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여행지에 도착해서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혹사시키며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지의 랜드마크를 한 곳도 빠짐없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여름휴가철 바캉스를 떠나는 프랑스인처럼 누구에게는 온전한 휴식이 여행이 목적인가 하면, 어쩌면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 많은 장소에서 많은 사진을 남겨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이에 쉼표를 찍는 것은 필수적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에스프레소의 본 고장에서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를 원 없이 먹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교환학생 시절, 나는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했다. 유럽에 온 뒤 처음으로 떠나는 나 홀로 여행이었다. 들뜬 나는 8일간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베로나, 그리고 밀라노까지 이동하는, 꽤나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기간에 최대한 많은 지역만을 가보기 위한 계획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나는 꽤 훌륭한 계획이라 생각했다.
로마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아침 6시에 일어났다. 금전적인 이유로 호스텔을 이용했는데, 거의 매일 밤을 옆 사람의 코골이 때문에 잠을 잘 못 잤다. 잠에서 덜 깬 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에 혼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준비를 한 뒤 하루종일 걷고 먹고 마셨다. 들뜬 마음과 주유된 카페인 덕에 첫 며칠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기만 했다. 현지의 피자, 젤라또, 파스타, 티본스테이크를 차례로 먹으며 명소들을 구경하다 보면 하루가 끝나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며칠간 몸을 혹사시키고 나니, 베네치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는 도저히 일어날 컨디션이 아니었다.
원래는 베로나에 가려 했지만 과감하게 이 일정을 포기했다. 기차로 이동하기에는 너무도 고된 일정이었고, 무엇보다 호스텔이 생각보다 쾌적하고 조용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통으로 쉬기로 했다. 우선 8시쯤 로비에 내려가 7유로짜리 조식을 먹었다. 저렴한 가격에 낮춘 기대감을 비웃는듯한 멋진 뷔페식 조식이었다. 오랜만에 다양한 채소들을 씹으며 하루의 계획을 세우려다가 그만뒀다. 그저 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이탈리아도 커피머신에서 뽑은 커피의 맛은 똑같았다. 그리고 호스텔 근처를 조금 걸으며 소화를 시키고 들어왔다. 자판기에서 1유로를 주고 생수를 사서 방으로 올라가서 양치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밀린 잠을 잤다.
밀린 잠을 자고 나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한 거라곤 잠자는 것밖에 없었는데 또다시 출출해졌다. 모자를 눌러쓰고 산책을 하며 봐두었던 중국집에 가서 볶음밥과 탕수육 비슷한 요리를 시켰다. 혼자 먹기에는 다소 많은 양이었지만 생각보다 배가 많이 고팠던 나는 그 자리에서 요리 두 개를 해치웠다. 오랜만에 먹은 중국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며 포츈쿠키를 반으로 갈랐다. 'You'll find exactly the tips and hints that'll help you. (당신에게 도움이 될 정확한 팁과 힌트를 얻을 것입니다.)' 그 뒤, 식당 앞의 카페에 들러 잠시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신 뒤, 근처 공원을 찾아 산책을 하고, 봉에서 턱걸이를 했다. 벤치에 앉아 오리 가족이 뒤뚱거리며 지나다니는 것도 구경하고, 야외 바에 앉아 스프릿츠도 한 잔 했다.
유럽에 온 뒤 내가 하던 여행과는 정말 다른 느낌의 하루였다. 이탈리아에 온 뒤 쌓였던 피로를 풀기에 충분한 하루였다. 여행이 길어지며 지쳐가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의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런 식이면 여행이 아무리 길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세계 여행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러한 시간도 갖고 있었겠구나. 포춘쿠키가 해주었던 말이 맞았다. 오늘 내가 발견한 팁은 쉼의 중요성이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교환학생 기간, 남은 여행을 더욱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