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자격에 대하여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지 않았다면 예술을 논하지 말라.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도발적인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예술적 소양을 판가름하는 척도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적 허영심이 깃든 선언으로 다가온다.
하나의 영화가 예술 감상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작동하는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는 정말로 예술의 깊이를 탐구하기 위한 통과의례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며 타인을 재단하는 문화적 속물주의, 소위 ‘홍대병’의 다른 이름일 뿐일까?
한 편의 영화가 던진 묵직한 질문은,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소통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시계태엽 오렌지>가 왜 그토록 강렬한 찬사를 받는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폭력과 범죄를 유희처럼 즐기던 주인공이
국가의 강제 교화 프로그램으로 선을 ‘주입’ 받는 과정을 그린다.
이를 통해 큐브릭 감독은 ‘자유의지가 거세된 선은 과연 진정한 선인가?’라는,
시대가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모두가 사랑하는 노래 ‘Singing in the Rain’을 가장 끔찍한 폭력의 순간에 흐르게 하여
관객의 관습적인 감각을 배반하고,
기괴한 미장센으로 가득 채운 화면은 단순한 자극을 넘어 영화라는 매체의 표현 영역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이러한 전복적인 연출과 철학적 깊이는 이 작품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평론가들이 왜 그토록 이 영화를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날카로운 반론이 제기된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도 모두에게 동일한 감동이나 지적 쾌감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평소 타바스코 소스의 상큼한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에게,
고통에 가까운 핵불닭볶음면을 건네며 “이걸 못 먹으면 매운맛을 모르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타바스코를 사랑하는 사람이 미식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
<시계태엽 오렌지>의 날 선 자극과 윤리적 불편함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작품의 감상 여부로 타인의 예술적 소양을 함부로 재단하려는 태도야말로,
예술의 본질인 다양성과 주관적 경험을 훼손하는 배타적인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어쩌면 이 논쟁의 핵심은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작품의 가치 평가를 넘어선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증명하는 ‘무기’로 삼으려는 일부의 ‘태도’다.
우리는 어느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고, 서로의 ‘자격’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이 영화를 향한 극단적인 호불호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왜 이 영화의 폭력성에서 통쾌함을 느꼈는지,
다른 누군가는 왜 같은 장면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경험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은 결국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투영하는 과정이기에,
타인의 감상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같다.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예술은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어 준다.
예술 앞에 정답은 없다.
있다면 오직 각자의 삶을 통과하며 남겨진 무늬처럼, 서로 다른 감상의 형태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각자의 감수성을 키워왔고,
그렇기에 모든 평가는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누군가에게 인생의 걸작으로, 다른 이에게는 피하고 싶은 문제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평가 모두 온당하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작품을 통해 자신과 타인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자격의 문제가 아닌 취향과 경험의 문제이며,
가장 성숙한 감상은 나와 다른 감상을 기꺼이 경청하는 태도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