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공간, 무너지는 인간: 스티븐 킹 공포의 정수

미지의 공포를 이겨내는 용기에 대하여

by 이땃쥐

공포의 대가가 우리를 초대하는 곳

‘공포의 대가’ 스티븐 킹. 하지만 그의 작품이 선사하는 공포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유령이나 피 튀기는 살인마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의 진짜 무대는 외딴 호텔, 눈에 고립된 마을, 안개에 휩싸인 슈퍼마켓 같은 ‘고립된 공간’이다.

그는 우리를 그곳에 가둔 뒤,

외부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우리 내면의 어둠이 어떻게 스스로를 잠식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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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의 잭 토랜스가 가족을 향해 도끼를 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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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저리>의 애니 윌크스가 작가의 발목을 부러뜨리기까지, 그들을 광기로 몰아넣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스티븐 킹이 공들여 설계한 공포의 본질은 바로 ‘한정된 공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심리적 붕괴’, 그 자체에 있다.


고립의 무대는 어떻게 확장되는가

스티븐 킹의 ‘고립’은 단순히 물리적인 차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기 걸작들이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이나 <미저리>의 외딴 집처럼

명확한 물리적 밀실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그의 세계관은 점차 확장되어 하나의 ‘마을’ 전체를 거대한 심리적 감옥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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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그것(It)>의 배경이 되는 ‘데리’ 마을이다.


데리는 평범한 소도시처럼 보이지만,

그곳의 어른들은 27년마다 아이들이 사라지는 끔찍한 비극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침묵하고 외면한다.

‘집단적 무관심’이야말로 아이들을 어른들의 보호로부터 완벽히 차단하는 가장 견고하고 투명한 벽이다.

‘루저 클럽’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공포를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오직 서로에게만 의지해야 하는 사회적, 심리적 밀실에 갇힌 셈이다.

이처럼 스티븐 킹은 눈에 보이는 벽을 넘어,

관계의 단절이 만들어내는 더 서늘한 고립을 통해 공포의 무대를 확장시킨다.

때로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공동체 자체가 가장 무서운 감옥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을 던지는 것이다.


공포의 진짜 이름, ‘알 수 없음’

고립된 공간에 갇힌 인물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 공포의 핵에는 바로 ‘미지(未知)’, 즉 ‘알 수 없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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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의 사람들은 안갯속 괴물의 정체를 모르기에 이성을 잃고 광신에 빠져든다.

<샤이닝>의 잭은 호텔이 가진 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힘에 잠식당한다.

이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과 대처할 방법을 모르는 ‘무지(無知)’의 상태는,

인간을 가장 나약하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것>은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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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 클럽’의 아이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공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주저앉는 대신 직접 움직인다.

도서관에서 마을의 역사를 파헤치고, 27년이라는 공포의 패턴을 발견하며,

‘그것’이 아이들의 두려움을 먹고 산다는 본질을 꿰뚫어 본다.

‘탐구’와 ‘학습’의 과정은 막연했던 공포를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공포의 진짜 이름이 ‘알 수 없음’이라면,

그것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알려고 하는 용기’임을 아이들 스스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무지를 지식으로 바꿀 때, 공포는 끝난다

‘루저 클럽’이 페니와이즈에게 거둔 최종적인 승리는 단순한 힘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지를 지식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낸 치열한 심리전의 승리였다.

아이들은 각자 마음속 가장 깊은 트라우마의 형상으로 나타난 페니와이즈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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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넌 진짜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공포의 허상을 스스로 깨부순다.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직시하고 그것의 정체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공포를 통제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결국 스티븐 킹이 말하는 공포의 본질은 우리 밖에 있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도사린 ‘알 수 없는 어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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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그것>을 통해 그 어둠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고, 마침내 이해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가장 끔찍한 공포마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이 오랜 시간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단지 무서워서가 아니라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의 용기를 발견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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