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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er Feb 16. 2022

[역사 이야기] 세 명의 마젤란

'탐험가, 배신자, 침략자'. 세 호칭으로 남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 마크 트웨인 -


역사상 부와 명예를 꿈꾸며 선뜻 모험에 나선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가치를 가슴에 새기지 않았을까? 보통 대중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탐험가는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이다. 그는 대서양 횡단을 통해 현재 미국이라 불리는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죽는 그날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


우리에게는 또 한 명의 잘 알려진, 한편으로는 의문투성이인 유명한 탐험가가 있다. 바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으로 알려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다. 하지만 그가 세계일주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를 둘러싼 각종 기록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존재하는 그런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놓고 누구에 대해서 다룰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학부 시절 리포트 과제에 활용했던 마젤란이 익숙할 것 같아서 그를 선택하기로 했다. 리포트 원본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과제를 끝내고 바로 폐기 처분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해 아쉽다. 어쨌든 이번에는 마젤란에 대해 간단히 다뤄보고자 한다.



마젤란, 그는 누구인가?


마젤란은 1480년 경 현재 포르투갈 북부 오포트루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어렸을 적 앤리케 왕자(D Infante Henrique) 등의 생애를 보며 항해의 꿈을 키워나갔고, 성년이 되어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부를 축적한 이야기를 듣고 항해에 대한 꿈을 더욱 키워 나갔다.


단순히 '세계일주'라는 명성이 너무 큰 나머지 그의 성격에 대해 간과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의 성격은 굉장히 냉철하고 고집이 셌다. 또 이후 설명할 항해 과정에서도 나오겠지만 부하들을 굉장히 혹독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리 등에 대한 집착이 심하기도 했다.


한편 포르투갈과의 관계도 썩 좋지 못했다. 그는 조국인 포르투갈을 위해 봉사하고자 했으나 횡령 혐의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모로코 전투 등에 참전한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마누엘 국왕에게 현재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획을 설명했으나, 그것마저 희망봉을 우회하는 경로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후 그는 포르투갈 대신 스페인에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마젤란은 스페인에서도 난관에 봉착하기 일쑤였다. 포르투갈 왕실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 통상원의 비협조적 자세, 낡고 녹슨 배들, 선원의 모집 문제 등등... 항해를 시작하기도 전에 계획 자체가 물거품에 놓일 위기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국왕의 승인을 얻었고, 마젤란은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목표 하에 당시 기준으로 전례 없는 대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전례 없는 항해를 떠나다


본 글에서는 마젤란의 서쪽 경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출처: doopedia.co.kr)


지도로만 보면 정말 쉬운 항해 같지만, 항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카보베르데(Cabo Verde) 군도에서의 갈등, 각종 폭동의 연속... 하지만 그는 특유의 독단적이고 냉철한 성격을 이용해 부하들을 혹독히 다루었다. 폭동이 일어나면 사태를 수습해 즉결 처형했으며, 무인도에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항해 과정 자체도 힘들었는데, 이는 마젤란 일행이 항해하면서 남긴 기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우리는 태평양으로 진입했다. 여기서 식량이나 음식물을 구하지 못한 체 석 달 일을 머물렀다. 우리는 단지 오래돼서 거의 가루나 다름없는 비스킷을 먹었는데, 이것마저 벌레 먹고 쥐 오줌 냄새가 풍기는 고약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썩어서 노랗게 색이 변한 물을 마셨다. 우리는 또한 햇빛, 비, 그리고 바람 때문에 딱딱해진 소가죽까지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닷물에 4-5일을 불려서 석탄불에 잠시 올려두었다. 그리고서 우리는 그것을 먹었다. 쥐들 또한 좋은 식량 거리여서 한 마리에 반 크라운에 팔렸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충분한 편이 못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젤란 일행은 1520년 10월 25일,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괌(Guam), 로타(Rota), 사이판(Saipan) 섬을 발견했으며, 그곳에서 원주민의 약탈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일행은 사마르(Samar)를 거쳐 세부(Cebu)로 향하게 되었다.


마젤란은 세부 섬의 라자(추장 정도)인 후마본(Humabon)에게 세례명을 내리고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막탄(Mactan) 섬의 라자가 후마본과 관계가 좋지 못함을 알게 되었고, 이는 마젤란 일행으로 하여금 막탄 섬 점령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1500명에 달하는 막탄 섬의 준비된 병력에 수십 명의 에스파냐 선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마젤란도 이 전투에서 막탄 섬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를 둘러싼 평가


현재 마젤란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단행한 위대한 탐험가'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조국을 버리고 에스파냐로 넘어간 배신자', 필리핀 막탄 섬에서는 '후마본에 협조해 우리 영토를 뺏으러 온 침략자' 정도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포르투갈의 국왕이나 막탄 섬의 라자였다고 상상을 해보자. 과연 그런 상황에서 마젤란이 벌인 행동을 좋게 평가할 수 있었을까?


실제 마젤란이 항해 중 발견한 태평양(Pacific Ocean), 몬테비데오(Montevideo),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등은 아직까지도 그가 명명한 그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찌 되었든 당시 포르투갈과 필리핀 막탄 섬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위대한 탐험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다수에 속한 것을 알게 된다면
이때는 멈추고 반성해야 할 시간이다.
- 마크 트웨인 -


물론 마젤란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평가하는 것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실제로 세계일주를 완주한 사람은 그의 부하였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현재 마젤란은 '최초로 세계일주를 단행한 위대한 탐험가'로 남아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주류 생각이라고, 다수의 의견이라고 소수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크 트웨인이 그랬듯, 다수에 속한 것을 알게 된다면 이때는 멈추고 반성해야 할 시간이다. 다수에 속한 것은 그냥 그 자체인 것뿐이지. 그것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먼 옛날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이 어느새 지동설로 바뀌었고, 만물이 물과 불, 흙과 공기로 이루어졌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젤란에 대한 평가도 언젠가는 바뀔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본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정열적인 모험심, 그리고 신대륙을 발견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는 그의 업적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인류사에 있어 위대한 발자취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출처 목록>

지도: 페르디난드 마젤란 (naver.com)

논문(1): 최영수 (2006). 세계일주항해가 마젤란에 관한 연구. 중남미연구, 24(2), 259-295

논문(2): 김성준 기자, 대항해자들의 발자취 ( 2 )  페르디난드 마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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