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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h Jan 19. 2024

짝을 잃은 보호수


제주에 입도한 지 십 년. 한림에 산지도 십 년. 이제 조금씩 마을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가고 보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소소하게 적어 보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님도 모르는 우리 동네 이야기,...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보호수

가을이 되면 샛노란 은행나무 가로수 길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가끔 제주에 살면서 은행빛이 만발한 가로수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제주는 가로수를 은행나무로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엔 ‘은행나무가 제주에는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우리 동네만 해도 4그루나 있는게 아닌가. 적어도 우리 동네 은행나무는 노랗게 되기도 전에 잎이 떨어진다. 즉, 은행잎이 초록색을 머금고 낙하하기 때문에 은행나무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큰 길가에서 찍은 보호수_누가 이 나무를 보호수로 알까!


맞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우리 동네 보호수는 "은행나무"다. 사실 이 보호수를 2년 전에 마을 향토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8년 동안 수없이 그 근처를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이동하며 지나기도 했는데, 그 존재를 몰랐다. 우리 집에서 1킬로미터도 안 되는 지척 거리에 있는 보호수를 왜 몰라 봤을까! 우선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은행나무 한그루 보자고 보호수라는 명명하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행정기관이 보호수라며 정말 보호하기 위해(?) 보호수 간판을 입구부터 친절히 세워둔 것도 아니다. 또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가을이 되어도 시선을 끌 정도의 노란빛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의 방치되다 싶게 버티고(?) 있는 보호수_가지가 제주시 방향이다.


이 보호수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명월진 수군만호(무관 관직)를 지냈던 김기반이라는 사람이 유배인 심부름으로 한양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들고 간 서신을 뜯어보지 말라는 명을 받고 출발했다고 한다. 내용이 궁금했으나 김기반은 명을 어기지 않고 한양까지 편지를 잘 전달했고, 편지 말미에 "만일 이 편지가 개봉되지 않은 채 무사히 이 판사 대감에게 전달되거든 내가 보낸 사람에게 벼슬 한자리를 내려 주시라"는 청탁의 글이 있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받은 이판사(이학수)는 김기반을 신뢰하여 강원도 군관으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근무하던 중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에 이판사는 효심이 가득한 김기반에게 은행나무 두 그루(암수 각각 한 그루씩)를 선물한다. 한 그루는 집 출입구에 심고(수그루) 다른 한 그루는(암그루) 행방이 묘연하다. 그래서 이 수그루(보호수)는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에 있는 암그루를 향해 있다고 한다.


나 혼자라도 관심 갖게 된 보호수

왜 제주향교에 있는 암그루를 향해 이 보호수는 가지를 뻗고 있을까? 실제로 은행나무 가지가 제주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명월과 제주시 사이에 암그루는 향교에만 있는 것일까? 그래서 제주향교를 가봤다.

향교에는 행단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행단정은 단(壇)을 만들고 은행나무를 심어 공자가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다. 제주향교는 1985년 국내 최초로 향교 내에 행단정을 건립했다. 정말 제주향교를 가보니 행단정 옆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은행나무 수령이 180년은 됨직해야 행방이 묘연한 김기반의 암그루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딱 봐도 50년 이쪽저쪽쯤 돼 보인다. 궁금해서 향교 사무실에 연락을 해보니 이 은행나무는 암그루가 맞지만, 수령이 40~50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내 눈은 못 속인다. 그리고 이 은행나무를 행단정이 건립될 때 심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문의해 봤지만, 은행나무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러니 이 암그루는 김기반이 선물 받은 나무가 아닌 것이다.

제주향교 내 행단정과 은행나무


제주향교 지척거리엔 제주목관아가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제주도청인데, 목관아에 은행나무가 없는 걸까? 관에서 내려 준 은행나무니까 제주시 방향을 하고 있고, 목관아에는 암그루가 없으니 그 옆에 있는 제주향교 암그루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날이 풀리면 목관아에 가 봐야겠다.


이 보호수가 위치한 곳에 가 보면 빈 집 입구에 방치되듯 서 있다, 아니 기울어져 있다. 분명 김기반의 집이었을 텐데, 지금은 김한우가 관리자라고 보호수 푯말에 적혀있다. 김기반의 후손일 것이다. 빈 집이라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만, 세계적인 작가 양혜규도 2006년에 빈집에서 개인전을 열어 유명세를 타지 않았던가. 누군가 이곳에 현대미술을 전시한다면 의미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다. (보호수 위치: 한림읍 명월리 2106)


보호수가 있는 빈집(좌), 보호수가 보이는 빈집 창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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