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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h Feb 15. 2024

다시 태어난 한림수직

사진출처: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주에 입도한 지 십 년. 한림에 산지도 십 년. 이제 조금씩 마을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가고 보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소소하게 적어 보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님도 모르는 우리 동네 이야기,... 그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제주에 새겨진 아일랜드 문양

제주는 원래 아일랜드(island) 아냐? 하하. 이 아일랜드가 아니라 그 아일랜드라는 걸 다 알 것이다. 머나먼 땅 그 아일랜드(Ireland) 문양이 제주 한림에 새겨진 이야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아일랜드(Ireland) 수도 더블린에서 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골웨이만에 위치한 아란제도(Aran Lslands)에서 유래된 아란 무늬가 제주에 상륙했던 것이다. 아란무늬란 스웨터에서 볼 수 있는 일명 꽈배기 무늬다. 제주에서 아일랜드 아란 무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분으로 인함이었다. 이 분은,...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막 치른 1953년 제주에 파란 눈의 신부님이 한림성당으로 발령받아 오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25세. 이름은 맥그린치(Patrick James MaGlinchey, 1928-2018)였다. 그렇다. 맥그린치 신부님이 당신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공수해 온 물레와  직조기술로 제주 여성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한림수직"이 태어났고, 한림수직 제품은 아란무늬가 입혀졌다. 2018년 한림 이시돌목장에 묻히기까지 65년을 제주와 제주사람을 위해 헌신하신 맥그린치 신부님(한국명: 임피제)은 2014년 자랑스러운 제주인으로 선정되고, 2015년 국민들이 추천하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중산간서로와 금악북로에 위치한 신부님 기념비


한림수직(1959-2005)

맥그린치 신부님이 제주에 부임하자마자 스웨터를 제조한 것은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 너무나도 빈곤하게 살고 있는 제주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돼지를 키워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당시 제주 여성들은 밭일과 해녀 물질 외에는 할 일이 많지 않아, 일자리를 찾아 육지로 떠나곤 했는데, 어느 날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갔던 16살 소녀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목도한 맥그린치 신부님은 부지런한 제주 여성들의 손을 빌려 양모를 생산하고 그것으로 스웨터, 담요 등 여러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한림수직이 탄생된 배경이다.

처음에는 맥그린치 신부 어머님의 물레를 가져와 실을 뽑았는데 기술이 부족해 실 굵기가 들쑥날쑥했고 완성된 제품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일랜드에서 기술자 수녀님들이 제주로 와서 기술을 가르치면서 품질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사진출처: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수녀님들이 기술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워 노동력을 제공한 제주 여성들은 월급을 받고, 그렇게 생산한 제품은 유통 및 홍보까지 맡아하면서 명실공히 로컬 브랜드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때 재택근무자만 해도 1,300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로컬 브랜드는 날로 성장하여, 명품으로 인정받아 1977년 명동 조선호텔과 제주 칼호텔에 직영 매장을 열었다. 또한 미 평화봉사단 소속으로 제주에 머물던 미국인이 한림수직의 산업과 제품을 보고 놀라 현지 언론에 제보했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타임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림수직은 1990년대 정점을 찍은 뒤 중국산 양모 수입과 화학섬유가 쏟아지면서 차차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2005 정식으로 폐업이 되었다.

한림수직에서 일하고 있는 제주 여성들<이미지 출처: 매거진 iiin 2020년 봄호 26, 28쪽>


한림수직 재생프로젝트

현재 '콘텐츠그룹 재주상회'가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와 손을 잡고 한림수직 재생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제품도 구매할 수 있고, 오프라인으로도 한림수직 제품을 볼 수 있는데, 한림읍 금악리에 가면 성이시돌센터(금악북로 353)가 있다. 여기에 가면 맥그린치 신부님이 제주에서 행했던 일들과 옛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고, 한림수직 제품도 볼 수 있다.

이시돌센터에 전시되고 있는 한림수직 재생프로젝트


1960년대 후반에 제주 한림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우리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금악 이시돌목장이 지금도 있는지 물어보곤 하신다. 내가 한림수직을 알게 된 후 아버지에게 그 당시 이시돌 목장에 양 떼들이 있었는지, 한림수직이란 제품을 본 적 있는지 여쭤보면 기억이 없으신지 답변을 못하신다. 60년대 후반이면 한림수직이 막 일어서는 시기였을 거다. 금악이 당신 관할구역이었다는데, 우리 아버지가 조금만이라도 애처가였다면 금악에 가셨을 때 스웨터 하나 구입해서 휴가길에 어머니께 선물했다면, 우리 집도 한림수직 제품 하나는 간직한 집안이었을 텐데 말이다. 애처가는 무슨 ㅎㅎ 우리 어머니 시집살이, 남편살이 한 이야기는 대하소설감. 90을 바라보시는 지금도 매일 말다툼하신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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