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주에 입도한 지 십 년. 한림에 산지도 십 년. 이제 조금씩 마을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나 가고 보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소소하게 적어 보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님도 모르는 우리 동네 이야기,... 그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제주에 새겨진 아일랜드 문양
제주는 원래 아일랜드(island) 아냐? 하하. 이 아일랜드가 아니라 그 아일랜드라는 걸 다 알 것이다. 머나먼 땅 그 아일랜드(Ireland) 문양이 제주 한림에 새겨진 이야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아일랜드(Ireland) 수도 더블린에서 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골웨이만에 위치한 아란제도(Aran Lslands)에서 유래된 아란 무늬가 제주에 상륙했던 것이다. 아란무늬란 스웨터에서 볼 수 있는 일명 꽈배기 무늬다. 제주에서 아일랜드 아란 무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분으로 인함이었다. 이 분은,...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막 치른 1953년 제주에 파란 눈의 신부님이 한림성당으로 발령받아 오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25세. 이름은 맥그린치(Patrick James MaGlinchey, 1928-2018)였다. 그렇다. 맥그린치 신부님이 당신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공수해 온 물레와 직조기술로 제주 여성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한림수직"이 태어났고, 한림수직 제품은 아란무늬가 입혀졌다. 2018년 한림 이시돌목장에 묻히기까지 65년을 제주와 제주사람을 위해 헌신하신 맥그린치 신부님(한국명: 임피제)은 2014년 자랑스러운 제주인으로 선정되고, 2015년 국민들이 추천하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한림수직(1959-2005)
맥그린치 신부님이 제주에 부임하자마자 스웨터를 제조한 것은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 너무나도 빈곤하게 살고 있는 제주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돼지를 키워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당시 제주 여성들은 밭일과 해녀 물질 외에는 할 일이 많지 않아, 일자리를 찾아 육지로 떠나곤 했는데, 어느 날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갔던 16살 소녀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목도한 맥그린치 신부님은 부지런한 제주 여성들의 손을 빌려 양모를 생산하고 그것으로 스웨터, 담요 등 여러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한림수직이 탄생된 배경이다.
처음에는 맥그린치 신부 어머님의 물레를 가져와 실을 뽑았는데 기술이 부족해 실 굵기가 들쑥날쑥했고 완성된 제품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일랜드에서 기술자 수녀님들이 제주로 와서 기술을 가르치면서 품질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수녀님들이 기술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워 노동력을 제공한 제주 여성들은 월급을 받고, 그렇게 생산한 제품은 유통 및 홍보까지 맡아하면서 명실공히 로컬 브랜드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때 재택근무자만 해도 1,300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로컬 브랜드는 날로 성장하여, 명품으로 인정받아 1977년 명동 조선호텔과 제주 칼호텔에 직영 매장을 열었다. 또한 미 평화봉사단 소속으로 제주에 머물던 미국인이 한림수직의 산업과 제품을 보고 놀라 현지 언론에 제보했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타임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림수직은 1990년대 정점을 찍은 뒤 중국산 양모 수입과 화학섬유가 쏟아지면서 차차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2005 정식으로 폐업이 되었다.
한림수직 재생프로젝트
현재 '콘텐츠그룹 재주상회'가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와 손을 잡고 한림수직 재생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제품도 구매할 수 있고, 오프라인으로도 한림수직 제품을 볼 수 있는데, 한림읍 금악리에 가면 성이시돌센터(금악북로 353)가 있다. 여기에 가면 맥그린치 신부님이 제주에서 행했던 일들과 옛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고, 한림수직 제품도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 제주 한림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우리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금악 이시돌목장이 지금도 있는지 물어보곤 하신다. 내가 한림수직을 알게 된 후 아버지에게 그 당시 이시돌 목장에 양 떼들이 있었는지, 한림수직이란 제품을 본 적 있는지 여쭤보면 기억이 없으신지 답변을 못하신다. 60년대 후반이면 한림수직이 막 일어서는 시기였을 거다. 금악이 당신 관할구역이었다는데, 우리 아버지가 조금만이라도 애처가였다면 금악에 가셨을 때 스웨터 하나 구입해서 휴가길에 어머니께 선물했다면, 우리 집도 한림수직 제품 하나는 간직한 집안이었을 텐데 말이다. 애처가는 무슨 ㅎㅎ 우리 어머니 시집살이, 남편살이 한 이야기는 대하소설감. 90을 바라보시는 지금도 매일 말다툼하신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