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1월, 12월
2024.10.8. 태어난 지 527일째
어제 유진이 침대 가드 한쪽을 떼고 문을 만들어주었다. 어린이집 하원 후 침대에 문이 생긴 것을 본 유진이는 무척이나 좋아하며 혼자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문이 있는 침대에서 처음 자고 난 후 오늘 아침, 혼자 안전하게 내려와 아빠를 찾아왔다.
2024.10.15. 태어난 지 534일째
유진이가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벌써 나름의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기차를 보거나 말하면 "할아버지"하곤 한다. 비행기는 "할머니", 피아노는 "할아버지" 이런 식으로 어떤 사물을 말하면 그에 연관된 자기 만의 추억을 떠올리나 보다. 서울 할아버지와 창 밖으로 기차를 내다보던 일, 서울 할머니와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날린 일, 수원 할아버지와 피아노를 연주한 일. '이렇게 어린 아기가 기억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라는 짧은 생각을 가끔 하던 내가 머쓱하다.
2024.11.4. 태어난 지 554일째
어린이집 하원 길, 문을 나서며 만난 까치를 보며 유진이가 "짹짹"이라며 반가워한다. 나는 까치는 "깍깍"운다고 알려주었고, 유진이와 함께 어린이집 뒤로 날아간 까치를 찾으러 가보았다. 유진이는 "깍깍"하며 까치에게 다가갔고, 소나무 숲 사이로 몸을 숨긴 까치를 보면서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유진이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순간을 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행운과 그 행복을 새삼 느끼며 나도 너무 즐거웠다.
2024.11.17. 태어난 지 567일째
오늘의 아침식사는 호박죽과 호두식빵, 그리고 토마토달걀볶음. 죽과 빵이 너무 맛있는지 잘 먹던 토마토달걀볶음을 오늘따라 안 먹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유진.
"유진아, 이거 잘 먹던 거잖아. 진짜 맛있어. 한 번만 먹어봐"
아빠의 거듭된 권유에 한 입 먹은 유진이는 씩 미소 짓는다.
"거봐, 맛있지? 아빠 말 믿어! 아빠는 맛없는 건 먹이지 않아! 빵이랑 같이 먹어볼래? 더 맛있을걸?"
빵과 토마토달걀볶음을 같이 한 입에 넣은 유진이는 이번에도 미소로 답한다. 심지어 입까지 살짝 벌리고 "허, 허허"라며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러고는 밥을 먹으며 내 팔을 끌어당기고는 고개를 기댄다.
2024.12.7. 태어난 지 587일째
지난주 금요일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고열이 지속되다가 갑자기 열이 떨어지고 온몸에 발진이 생겼다. 병원에서는 '돌발진'이라고 알려주며 짜증이 많아지는 병이라고 한다. 오랜 고열로 체력이 떨어지고 발진으로 불편해서 그런지 평소와 다르게 안아달라고 심하게 보채고 급기야 나한테 기대어 잠들기도 한다. 낮잠도 하루에 2번으로 늘었다. 그 와중에 코 상태가 심해져 끊었던 항생제를 다시 먹게 되었고 얼굴에는 눈에 잘 띄는 상처가 생겼다. 나는 부모로서 못하고 있는 자책을 그다지 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우연들을 이겨내기 어려워 때로는 자책하게 되고, 또 어느 때에는 무기력하고 답답해진다. 내 품을 찾으며 우는 유진이를 안아주는 일은 힘들지 않지만, 그 얼굴을 마주하기는 조금 힘들다.
그래도 착한 유진이. 낮잠을 자기엔 늦은 시간임에도 자겠다고 누워 떼를 쓰다가 의도치 않게 나를 때리길래 내가 "아야"하니, 떼쓰기를 멈추고 잠시 조용히 있더니 "아빠 호~"해준다.
2024.12.8. 태어난 지 588일째
유진이와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 구경을 했다. 단지 내에서 눈을 밟고 만져보고, 나무에 쌓인 눈을 툭 털어 눈 내리는 것처럼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 전부이지만 유진이는 상당히 좋아했다. "재밌어? 좋아?"라고 물으니 "좋아!"라고 답하며 웃는 유진이였다.
요즘 들어 유진이가 작년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느낀다. 나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고 있음은 진작 알았지만, 이제는 한 사람이자 가족 구성원과 대화하고 교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사와 감정표현이 다양해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이의 성장과정 모든 순간을 저장해두고 싶다는 말이 공감되는 요즘이다. 벌써 지나가 희미해져 버린 어제와 오늘의 작은 순간순간들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