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_ 무릇 계곡이란 이런 것

190914~190915 / 설악산 / 수렴동계곡 ~ 천불동계곡

by 르겔

주변에 보면 계곡으로 놀러가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계곡으로 놀러간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나 역시 계곡에 놀러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계곡은 딱히 없었다. 무언가 어설픈 관광지같은 강가에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도 않는 자리들이 놓여있었다. 물에 들어가면 입고 있는 옷이 몽땅 젖었고 축축한 상태로 상에 걸터앉는다. 그나마 물이 맑고 자연스러운 계곡은 나았다. 어떤 계곡은 강가에 발린 시멘트가 계곡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도무지 힘을 써서 그 곳에서 내가 놀아야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나에게 계곡은 그런 곳이었다.




등산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지만 그 후에는 아니었다. 산에서 만난 계곡들은 자연 그대로였다. 마음 아프게 변형된 곳들도 있긴했지만 대개 자연과 어우러진 곳들이었다. 난잡하다거나 더러운 느낌도 주지 않았다. 자연 그 자체였으니까. 그저 그 장소의 한 생김새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울창한 나무와 깎인 바위 그리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이면 계곡에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계곡보다는 능선을 좋아했다. 주로 탁트인 공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맛에, 하늘 열린 길을 따라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탐방하는 맛에 능선 산행을 선호했다. 계곡 산행은 그저 어쩌다 한 번, 시간에 맞춰 선택한 등산로가 하필 계곡길인 경우에나 해왔다.


2018년 10월 이후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계곡 산행을 나서서 찾게 되었다. 친구와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공룡능선을 타려다가 비도 오고 시간도 늦어 예약해둔 양폭 대피소로 곧장 향했다. 대피소까지 이르는 길에 마주한 천불동 계곡은 상상하지도 못한 그림이었다. 허락없이 선계를 넘보는 황홀한 기분은 강렬하다는 느낌도 주지 않은채 나를 지배했다. 그저 넋 놓고 바라보게 만드는 경치는 나를 다시 설악으로 이끌었다.




수렴동계곡


이번 산행은 수렴동계곡으로 올라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오는 계곡 산행이었다. 9월 중순, 여름을 떠나보낼 준비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시기이다. 아직도 푸르고 울창한 나무와 시원한 계곡이 여름 분위기를 물씬 내고 있었다. 또한 설악산의 계곡은 여느 계곡같지 않다. 골이 매우 깊다. 자연에 몸을 걸친 느낌이 아니라 자연 속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물아일체의 지경이라는 표현은 자연과 합일되는 순간에 참으로 쓰일만 하다. 배움이 짧은 탓인지 그만큼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하단부에서 본 쌍룡폭포


천불동계곡의 이름을 알 수 없는 폭포


설악산은 계곡이 깊다보니 굽이치는 폭포도 많이 만날 수 있다. 낙수(落水)의 미에 더하여 절수(折水)의 미까지 갖춘 폭포들이다. 또한 유량이 풍부한 시기에 갔더니 폭발하는 야성미까지 볼 수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강하게 몰아세우고 내리꽂는 야수의 모습을 설악산의 폭포들로부터 느꼈다.





수렴동과 천불동 두 계곡을 겪으려면 20km가 넘는 결코 짧지 않은 산 길을 걸어야 한다. 대청봉이라도 경유하려 한다면 25km에 달하는 거리이다. 하지만 그 길고 험한 산 길은 괜히 길고 험하지 않다. 그만한 인내에는 설악의 선물이 기다린다. 어느 산도 비길 수 없는 깊은 계곡이 기다린다. 물살과 바위, 산세의 조화는 우악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우악스러움은 넋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선계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설악의 계곡을 걸으며 조용히 나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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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계곡이란 이런 것이다.'